대학원 다닐 때 수업의 일환으로 서로 작품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포트폴리오의 이미지만 보고(캡션도 없음) 이야기를 나눴었습니다. 그때 제가 다른 분들께 드렸던 코멘트들인데, 지금 다시 보니 재미있어서 공유합니다. 제가 받은 코멘트들도 다시 읽어보니 재미있는데 다른 분들이 써주신 것이다보니 공유는 하지 않습니다.
나의 코멘트 모음
김인영 작품에 대해
포트폴리오 초반의 작업들은 기존 공간의 일부를 잘라내어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키거나, 그 공간의 무늬를 왜곡시키는 것이 주요 형식으로 보입니다. 우연한 얼룩, 나무의 결, 지나가는 파이프 등으로부터 어떤 이어지는 패턴, 무늬 등을 보고 새로운 형태-주로 한쪽으로 긴-를 만듭니다. 이를 제시할 때 또한 공간에서 제시됩니다. 여기에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기존의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가서 작가만의 형태가 강조됩니다. 오려진 형태가 공간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점유하면서 공간을 새롭게 읽게 됩니다. 2 슬라이드의 경우 천장이 뜯겨 내려온 것 같다거나, 4 슬라이드의 경우 바닥 일부가 푹 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후반 슬라이드를 보면 발견하는 무늬 자체도 작가가 직접 만드는 식으로 작업이 변화한 듯 합니다. 이 무늬들도 마룻바닥의 무늬들처럼 우연적인 측면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5 슬라이드는 많은 우연을 실험해 하나를 택하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색 선택은 다소 의도적인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강렬해서 마룻바닥이나 천장의 갈색, 하얀색보다는 더 무늬가 강조됩니다. 초반 작업이 공간을 관찰하고, 추출하고, 그 공간을 새롭게 점유하는 것이었다면 후반 작업은 직접 만든 무늬에서 일부를 추출해 주어진 공간을 재해석하는 것으로 보여, 공간 그 자체에 대한 탐구에서 자신의 작품이 공간을 어떻게 해석하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으로 변한 것으로 보입니다.
송민지 작품에 대해
따뜻한 느낌을 주는 천들, 건식 재료와 수채를 사용한 드로잉들, 스티커처럼 붙여진 드로잉들,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듯한 가늘고 크림같은 형태들, 작은 액자, 둥근 그림, 작고 네모난 그림들이 한 데 모여 설치됩니다.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서 하나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작가가 구성하는 세계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관객은 기존 세계와 다른 이 세계를 엿보는 입장입니다. 이 세계는 현실에서 보기 힘든 분홍색, 톤다운된 코발트색, 강렬한 주황색과, 현실에서 자주 보게 되는 때가 탄 듯 누리끼리한 색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색의 구성 자체에 이미 현실에서 출발한 픽션, 현실의 어떤 면을 과장한 허구의 느낌이 드러납니다. 유인원과 비슷한 형태의 여성, 성기를 떠올리게 하는 과일, 내장같은 오브제들을 묶어 주는 것은 주로 천, 로프, 기다란 오브제 등 길게 늘여지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어떤 이중성, 공격성이 보입니다. 천과 로프는 그다지 강해보이지 않고, 약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느껴지며, 작품에서도 세계를 묶어주고 가렸다 보여주는 역할을 하면서도, 작품 속 이미지들이 지닌 잔인함에 의해 관객을 덮칠 것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천이나 로프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으니까요. 걸핏 약하고 소녀스러워 보이는 것 뒤에 숨겨져 있는 공격성이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고생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여고생의 대외적 이미지는 순수, 왈가닥, 연약함이지만 실제로 여고생만큼 속에 분노가 끓고 있는 강한 존재가 어디 있을까요. 올려주신 슬라이드는 주로 벽에 설치된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공간 전체로 확장되면 연약함과 공격성 중에 후자가 지금보다 강하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또한 각각의 세계 구성원을 이루고 있는 드로잉의 선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입니다. 얇지만 강한 선과 얇고 흐린 선이 있습니다. 얇고 흐린 선은 몽환적인 느낌, 가녀린 느낌을 주지만 얇고 강한 선은 그 가녀림 속에 숨겨진 시니컬함을 드러냅니다. 이 얇고 강한 선에는 특유의 표정이 있습니다. 관객을 비웃지만 그 비웃음은 어딘가 슬프고 따뜻합니다.
강솔 작품에 대해
얇고 투명한 이미지들이 반복됩니다. 얇고 투명하다는 느낌을 유발하는 것은 트레이싱지, 투명 아크릴판, 레진, 비치는 천, 반투명하게 찍힌 이미지들입니다. 기본적으로 반투명하고 사진에서 추출된 듯한 얇은 선의 이미지들이 존재하고, 이 이미지들이 이미지 자체로 존재할 때, 아크릴판이나 레진 속에 존재할 때, 영상 속에 존재할 때가 각기 다르고 책자, 모빌,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등 서사를 지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다르게 보입니다. 이미지로만 존재하며 서사에서 벗어나 있을 경우 감각적인 느낌이 강하게 다가옵니다. 투명함으로 인해 디지털의 느낌도 생각나지만 이미지 자체는 단색이며 흐릿한 부분이 존재하고 불안정해서 마냥 디지털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라기보다는 디지털 시대의 사람들이 겪는 반응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한편 이 이미지들이 서사 속에 존재할 때는 또 다른 느낌이 됩니다. 아크릴판에 있을 때는 이미지 자체에 가깝지만, 모빌을 이루는 레진이나 석고 속에 들어가니 서사를 지니게 됩니다. 레진과 석고는 유리조각, 돌조각과 같은 느낌을 주는데, 매우 투명하고 새하얘서 자연적이기보다는 인위적으로 보입니다. 영상 속에서도 이 이미지들은 인위적으로 삽입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인지, 이 이미지들은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다른 것들에 결합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얼마든지 다른 것에 흡수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은, 다시 말해 매우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작품은 그래서 투명하고, 깨질 것 같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것 같은, 연약한 이미지를 줍니다.
서제만 작품에 대해
드로잉과 영상을 모두 봤을 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필멸하는 존재로서 인간이 사라지고 변하는 것에 대한 아련한 감각입니다. 이러한 감성이 드러나는 방식은 은유적입니다. 드로잉, 영상, 설치 모두 어떤 내러티브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드로잉의 경우 추상화되어서 내러티브를 완전히는 알 수 없지만, 툭툭 끊기는 선, 흐릿하게 드문드문 이어지는 선 등은 사라졌다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영상의 경우 내레이션과 이미지가 있는데, '자라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 '여기의 물을 먹고 산다'는 등 내레이션이 은유적이지만 꽤 확실히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낸다면, 이미지는 글과 연결될 때를 제외하면 직접적이지는 않습니다. <Substitute> 에서 화면 전반에 깔리고 있는 눈을 떠다니는 듯한 미생물 같은 것들이라든지, 부서진 부분이 보이는 3d 모델링은 드로잉의 특성도 생각나게 합니다. 설치 작업의 경우 드로잉이 입체적인 공간이 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관객이 작품 내부에 직접 몸을 진입시키는 설치의 특성 때문인지 영상작업에서와 달리 메시지가 강하게 느껴지지는 않고, 드로잉에서처럼 감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몇천년된 동굴에 있을 법한 형상들을 가짜로 만들어내고, 그것들 사이사이에 최근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드로잉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은 영상에서도 드러나는데, 시간의 혼란이라고 할까요, 오래된 것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그건 만든지 얼마 안된거고, 새로운 것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있고, 이런 지점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감각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현호 작품에 대해
물의 이미지와 파란색이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파란색도 범위가 넓은 색인데, 작가는 주로 밤의 바다, 구름이 잔뜩 낀 날의 바다를 생각나게 하는 채도가 낮고 어두운 파란색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초록과 주황이 조금씩 섞여 변화하기도 하고 채도가 높은 전형적인 파란색도 보이지만 주된 색조는 프러시안 블루나 인디고 블루로 느껴집니다. 파란색은 후퇴하는 색이기도 하고, 게다가 검정에 가까운 파랑은 다른 것들을 흡수하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파도를 그리고 있지만 고요하고 침체된 느낌도 함께 받습니다. 폭풍전야같은 느낌입니다. 이런 느낌은 인체가 등장하는 작품에서도 이어집니다. 인체가 다소 구상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아주 내러티브가 강하지도 않고 완전히 추상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감각을 전하고자 하는 목적이 제일 큰 것으로 보입니다. 그 감각이라 함은 앞서 말한 것처럼 혼란 이전에 존재하는 조용한 감각, 고독과 비슷한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