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만지는 방법
박우진의 작품에 대하여
김륜아
박우진의 작품은 사진에 잘 담기지 않는다. 모든 시각예술 작품이 그러하겠으나, 그의 작품 속 어둠의 미묘한 요철은 직접 볼 때도 자세히 관찰해야 드러나는 종류의 것이다. 작품에는 분명히 구상적인 이미지가 존재하고 있지만,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어둠과 그 질감이다. 약 A3 크기의 어두운 검은색 화면이 2개에서 5개까지 연달아 있다. 화면 속 이미지는 조금씩 변주되며 반복된다. 반복은 강조와 무화의 기능을 동시에 한다. 그래서일까? 분명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이미지가 있음에도 처음에는 그 형상보다는 화면을 이루는 검은색의 질감에 집중하게 된다.
손으로 만지는 방향에 따라 느낌이 변하는 벨벳 천처럼, 화면의 검은색은 보는 위치와 빛의 방향에 따라 달리 보인다. 철 가루처럼 반짝이는 질감은 작가가 사용하는 메조틴트 기법에 기인한다. 작가는 동판에 무수히 많은 요철을 만들고 그 요철을 지워가면서 이미지를 만든다. 작가는 이런 과정을 ‘어두운 공간에 빛을 비추는’ 것으로 비유했다. 작품을 자세히 보지 않았을 때는 나도 어둠 속에서 서서히 눈이 밝아지는 암순응 현상을 떠올렸다. 하지만 작품을 살펴볼수록 시각적인 느낌보다는 촉각적인 느낌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형상은 가라앉고 보이지 않던 공기가 떠오른다. 어둠, 공기, 기체는 실제로는 만질 수 없는 것들이지만, 시각적으로 표현할 때에는 반드시 화면을 오래 만져야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다. 공간의 깊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밀도가 필요하며, 밀도는 화면을 직접 매만질 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메조틴트 과정을 ‘빛을 비추는 과정’이라기 보다는 ‘어둠을 헤아려 나가는 과정’, ‘공기를 만지고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요철을 만든 후 미세한 형상이 표현될 수 있도록 조금씩 지워나가는 작가의 메조틴트 과정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기체 분자가 대상으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지 천천히 헤아리는 일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모든 것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 해가 뜨기 전, 나의 움직임을 포착해 켜진 현관의 등, 조금 전까지 사람이 있었던 이부자리, 자동차 밑을 굴러다니다 사라지는 고양이. 새벽의 공기는 차지만 무언가 머물렀던 자리의 온기는 남아있다. 따뜻하고 축축한 공기는 공간을 헤집으며 위로 올라가고, 차고 건조한 공기는 묵직하게 아래로 가라앉는다. 작가는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면 더는 같은 장면이 아니라고 말하듯, 한 판을 사용해서 계속 변하는 화면을 만든다. <The Faraway Nearby>라는 제목은 그런 점에서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가깝지만 멀다는 모순적인 말은 가까운 거리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미세한 변화를 헤아리는 순간 먼 거리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지난한 일이다. 코앞도 천 리처럼 헤아린다는 것은. 그런데 의외로 산다는 것 자체가 그런 일인 것 같다. 삶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사소한 고통을 견디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 죽음보다 삶이, 가늘고 떨리는 시간을 버텨내는 것이 더 대단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박우진의 작품도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을 끄집어내어 보여준다. 수많은 찰나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쌓이고 쌓여 현재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 없이 지나치는 그 비가시적인 찰나도 허투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