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색깔 (Scene Color) 연작에 대해서
김륜아
차창 밖으로 햇빛이 내리쬐어 일순 만들어내는 그라데이션, 지금 저장하지 않으면 내 머릿속에서 파편으로만 남게 될 디지털 공간의 이미지들. 이런 이미지들은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붙잡기 어렵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현실의 풍경은 당연하고, 디지털 공간의 이미지들은 스크롤을 내리는 움직임 속에, 발광하는 빛의 파동 속에 있다. 이중에서도 최근에 내가 회화로 붙잡고자 하는 것은 영상, 움직이는 이미지다. 나는 부피가 없는 것들, 만져질 수 없는 것들, 질척거리지 않는 것들에 단단함과 질감을 부여하기를 좋아한다. 이중에서도 특히 움직이는 이미지를 골라 그 움직임을 한 화면 안에 가두게 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나는 시간을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간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었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항상 영화보다는 만화를, 그것도 스크롤 형식이 아닌 페이지형 만화를 좋아해왔다. 나는 보통 10분에서 20분 정도의 영상(주로 영화의 일부다.)을 보면서 A4 종이 한 장에 영상 속 사람이나 사물의 움직임을 연필이나 펜으로 드로잉한다. 장면이 전환되더라도 선을 그을 위치를 바꾸면 그만이다. 움직임의 종류나 강도에 따라 선의 특징을 바꿔가면서, 시간의 흐름을 시퀀스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한 화면에 쌓는다. 영상 속 움직임은 드로잉 속에서 더는 움직이지 않게 된다. 정확히는, 움직였던 흔적들의 중첩, 여러 번 겹쳐진 발자국 화석 같은 것이 된다.
나는 그 드로잉을 굳이 더 단단하고 질척거리는 회화로 만든다. 왜냐하면 나를 둘러싼 세계를 통제하고 싶다는 소망은 다시 말하면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이런 작업을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내가 가둔 영상 이미지의 움직임을 내 손으로 다시, 다른 방식으로 살리고 싶기 때문이었다. 나는 드로잉에 살아있는 색과 질감을 부여하여 물감이 쌓인 캔버스라는 물질로 구현한다. 드로잉의 부분부분에 어울리는 색과 질감을 미리 생각해두고, 알맞은 두께와 색으로 캔버스를 칠하기 시작한다. 밝고 선명한 원색들이 점도 높은 흙 반죽처럼 발린다. 이제 그림은 드로잉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화면에 기록되는 것은 영상의 움직임이 아니라 나의 움직임이다. 선의 중첩보다는 면과 색이, 내 움직임으로 인한 면과 색의 충돌이 더 중요해진다.
마지막 이유는 감정의 거리 조절을 위함이다. 이전에 나는 나의 감정을 주제이자 소재로 작업했는데, 그 과정은 나를 다시 그 감정 속에 놓이게 하여 고통을 유발하기도 했다. 움직임, 움직임을 회화로 구현하는 것을 주제로 해도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감정이 배출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움직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목표에 종속된다. 또한, 움직이는 이미지를 보고 드로잉을 하고, 움직임이 재구성된 드로잉을 보고 다시 나의 움직임으로 회화를 만드는 과정은 나의 신경을 몸과 눈에 집중시킨다. 나는 감정을 배출하고, 화면에 흔적으로 남기면서 관리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화가들처럼, 나는 그림을 볼 때보다는 직접 그릴 때 그 색과 질감에 제대로 매혹된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이 실제 그림을 만질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종 강렬하게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심지어는 만져봐야만 진짜 존재한다고 믿기도 한다. 과학적으로 여겨지는 촉진이라는 관찰 행위는 인간의 비과학적이고 종교적인 믿음에서 유래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다 그려진 그림을 만졌을 때 느껴지는 것은, 그 살 같은 외형과는 달리, 차갑고 딱딱한 무생물의 감각이다. 그림은 늘 이렇게 살아있는 상태와 죽어있는 상태를 오고 간다. 나는 이 까다로운 좀비를 길들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