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 작가의 레인보우 큐브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을 위해 썼던 글입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실패하는 리허설>을 보고", "불사의 꿈을 꾼 사람들은 모두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등 짧은 감상글을 썼고, 그 글들을 바탕으로 이 글이 나오게 됐습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다면 걷던 대로 걷는 수밖에 없다.
이유진 개인전 <무소(無所)를 헤매는 몸>에 대한 글
김륜아
우리는 더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마냥 비관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불안해한다. 우리는 강박으로 뭐라도 하려고 하고, 그게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이유진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태도는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유진의 작품을 다 보고 나면 살아갈 것을 다짐하게 된다. 이유진의 작품에는 앞을 알 수 없어도 계속 걸어 나가는 태도를 긍정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힘은 미래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이 앞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걷기를 멈추지 않는 작가의 태도에서 온다.
이유진의 작품 속에는 항상 한 가지 일을 그 일에 필요한 원래 노동량보다 더 많이 노동하는 과정이 존재한다. 이때 한 가지 일이란 대체로 단순하지만 계속하면 힘들어지는 일이다. 촛불을 불어서 끄는 것, 제 자리에서 뛰는 것, 물을 마시는 것, 걷는 것 등 모두 간단하지만 반복하면 숨이 차오르는 일들이다. 심지어 작가는 쉬운 일도 일부러 어렵게 만든다. 먼 거리에서 촛불을 끄려고 하고, 연필을 쥐고 108번을 뛰어서 하나의 드로잉을 완성하고, 하루 권장량 물 2L 마시기와 만 보 걷기를 하루 동안이 아니라 단 몇 시간 만에 해내려고 한다. 작가가 ‘굳이’ 자신의 노동력을 과할 정도로 할애하는 모습은 소위 ‘미련하다’고 불리는 행동을 닮아있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 미련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생을 위한 지루한 일들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미련한 짓거리를 작가는 더 미련하게 반복한다. 작가는 약 10분에서 2시간 정도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성심껏 노동한다. 우리는 그 노동의 끝에 어떤 결과가 있을지 모른 채 때로는 지루하게, 때로는 조마조마하게 지켜본다. 하지만 대개 그 결과란 작가가 들인 노고에 비하면 허탈한 것들이다.
<행복한 탄생>에서 작가는 가까이에서라면 단 몇 초면 끌 수 있는 촛불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약 5분에 걸쳐 힘겹게 끄려고 한다. 그러나 작가의 숨은 촛불을 움직이게는 하지만 끄지는 못한다. 촛불은 작가의 힘겨운 숨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가 다 타자 혼자 사라져버릴 뿐이다. <High Art>에서 작가는 ‘high’를 일부러 물리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고, 높은 곳을 향해 뛰어서 드로잉을 만든다. 이때 작가가 뛰는 횟수는 108번으로 불교의 수행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결과물은 그만큼의 힘을 들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권장되는 삶>에서 작가는 건강을 위해 흔히 추천하는 물 2L 마시기를 한번에 해내려고 하다가 결국 마지막 한 잔을 다 마시지 못하고 실패한다. 한편 만 보를 한번에 걷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그 성공은 약 2시간 동안 한 공간에서 쉬지 않고 걸어야 하는 괴로움의 끝에 지나지 않는다. <미완(부제: 충분히 성실하지 못한 작가)>에서 작가는 ‘성실하지 못한 작가’라는 부제와 달리 성실하게 계속 숫자를 적어나간다. 하지만 그 무작위적인 원주율의 숫자는 길어질 뿐 특별한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이처럼 작가의 작품 속에서 결과란 그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항상 고된 노동의 시간에 비하면 짧고 싱거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한계까지 혹사하므로, 이러한 과정과 결과물의 대비는 더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 짧고 허무하게 드러나는 결과의 순간이야말로 이유진의 작품이 지니는 아이러니를 가장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실패하는 리허설>은 산의 절벽이라는 장소적 특성과 고통스러워하며 서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인해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작가가 서 있는 돌은 그 아래가 미묘한 각도로 가려져 있다. 그래서 관객은 작가가 뛰어내렸을 때 무사할지 아닐지 알지 못한 채, 뛰어내리지 않기를 바라며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 그런 관객의 걱정이 무색하게 작가는 고통스러웠던 17분의 준비를 끝내고 산뜻하게 폴짝, 안전한 땅으로 뛰어내린다. ‘리허설’이라는 제목이 알려주듯, 이 죽음의 리허설은 실패로 끝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허설 이후에 실전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만약 이 작품의 다음 장면이 있다면, 그 장면은 죽음을 시도하는 장면이 아니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장면일 것이다. 이유진의 작품에서 결과의 무게는 그리 무겁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작업이 끝난 후에도 이런 지난한 살아감이 반복될 거라는 암시다.
이유진의 작품 속에서 노동의 과정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반복적으로 지속된다. 반면 그 결과는 순식간에 지나가거나 그리 강조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작품을 다 보고 나서도 관성적으로 작가의 행위가 반복될 거라는 인상을 받는다. 이런 느낌은 영상이 설치 작품처럼 놓일 때, 영상 속의 서사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도 전달된다. <실패하는 리허설>에서, 관객은 떨어지기 위한 준비를 하는 작가의 괴로운 모습을 편한 소파에 앉아 올려다보는 식으로 감상한다. <권장되는 삶>에서, 관객은 작고 어두운 방에서 물을 마시는 작가와 마주 보는 자세로 영상을 감상한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만 보를 걷는 영상을 영상 속 작가처럼 방 안을 빙글빙글 돌면서 감상하게 된다. <High Art>에서, 관객은 작가가 뛰었던 높이까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이렇듯 영상이 설치되는 방식은 관객이 작가의 행위에 더 몰입하게 하거나, 작가의 행동을 관객이 직접 반복하게 한다. 이러한 방식은 작가의 행동이 계속될 거라는 암시에서 나아가,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의 삶 또한 이렇게 지속되리라고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