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不死)의 꿈을 꾼 사람들은 모두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이유진의 <손을 놓아 파괴하십시오>, <내가 남긴 것>에 대해서
김륜아
읽기 전에: <손을 놓아 파괴하십시오>는 본래 관객이 직접 전시 공간에 가서 참여하는 작품이지만, 전시장에 가지 못한 나는 작가로부터 구를 전달 받아 내 집에서 작가가 지시한 일련의 과정을 수행했음을 먼저 알린다. 이 글은 전시 공간에서 이루어진 작업을 중점적으로 다루지만, 나의 경험 또한 일부 다루고 있다.
<손을 놓아 파괴하십시오>의 단계와 전시장은 모두 세 부분으로 나뉘어있다. 작가가 흰 흙으로 구를 만든다. 만들어진 구가 진열되어 관객에게 선택 받는다. 선택 받은 구가 관객에 의해 부서지고 작가에게 수거된다. 수거된 파편들은 물을 맞아 다시 흙으로 되돌아가고, 작가의 손길에 의해 다시 구가 되어 진열된다. 작가의 노동력으로 전시 기간 내내 반복되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순환하는 삶들을 떠올리게 한다. 흙이라는 소재, 하고 많은 도형 중에 구라는 어떤 온전함의 상징, 안정적인 숫자 3의 단계로 순환되는 과정.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이 아름다운 고리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실제 삶에는 도식과 숫자에는 존재하지 않는 불순물이 있기 마련이다.
하이얀 구는 부드러우며, 약간은 습기를 지니고 있어 촉촉하다. 완전히 마르지는 않은 모양이다. 표면에서는 만든 사람의 손자국이 미세하게 느껴진다. 구의 습기가 내게로, 내 온기가 구에게 전달되기 전에, 적당한 높이로 들었다가 손을 놓으면 쿵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난다. 소리와 실제 일어난 일에는 괴리가 있다. 구는 분명한 질량을 지녔지만 무겁지는 않다. 소리는 다르다. 이 보드랍고 가벼운 덩어리가 사실은 아주 무거운 것이었다는 것마냥, 둔탁하면서도 경쾌한 소리가 난다. 이 소리는 예측 불가능의 것이다. 흰 공간의 침묵을 갑자기 깨트리는 불청객. 호박이 굴러 떨어지는 것처럼 낮은 음이지만 강하게 울려 퍼져서 시원하게 느껴지는 소리. 나는 이 소리를 알고 있다. 사람이 떨어질 때 이런 소리가 난다. 가볍다면 가볍고, 무겁다면 무거운 것이 사람이다. 속은 거의 물로 차있지만 사실 사람은 꽤 무겁고, 그래서 떨어질 때 이런 소리가 난다고 한다. 구를 잡은 손을 놓는 순간, 이 독특한 소리와 함께 구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구가 지녔던 그 촉감과 질량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유에서 무가 되는 순간은 눈에 보이는 파편들과, 쿵-하는 소리와, 촉각의 상실로 드러난다.
작가는 이 파편들을 쓰레받기와 삽으로 다시 가져간다. 철판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신경을 긁는 소리가 난다. 이 장면은 화장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서 유골은 환경을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함부로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이 구의 가루들은 작가라는 창조주의 곁으로 돌아가 곧바로 새로운 삶을 얻는다. 이건, 전혀, 아름답지 않다. 죽음이라는 끝이 없는 삶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무로 돌아갈 수 없는 삶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얼핏 아름다운 순환으로 보이는 이 작품의 장면들은, 하얀색이 먼지와 손때로 조금씩 잿빛이 되어감에도 계속해서 돌아가야만 하는 잔인한 장면들이다. 인간에 의해 오염된 지구가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면 비슷할까? 그래도 지구 또한 언젠가 죽는다. 이 작품도 정해진 시간이 끝나자 끝이 났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이런 일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을 가정하는 일종의 가상 실험이다.
나는 작가에게 구를 따로 받아보았고, 그래서 나의 구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 버려졌다. 내가 구를 깨트린 날은 아주 덥고 하늘이 무척 파란 한여름이었다. 이건 아름다웠다.
<내가 남긴 것>은 약 30분의 영상이다. 이 영상은 어떻게 보면 변화가 없고, 어떻게 보면 참 변화무쌍하다.
부드러워 보이는 흙 위로 흰 옷을 입은 여자가 큰 대(大)자로 눕는다. 그대로 가만히 있는다. 소리를 들어보면, 비가 오고 있다. 꽤 굵게 지속적으로 내리고 있다. 반복되는 비의 리듬 사이로 여러 가지 소리들이 끼어든다. 아주머니들의 수다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강한 바람이 부는 소리. 이 잡음들은 이 장면을 매우 평화롭게 만들고 있다. 사실 딱 딱 딱 소리를 내는 비가 피부에 닿으면 마냥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굵은 빗줄기는 꽤 분명하게 살을 찌를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따금 고개를 돌리거나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모습이 포착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참 가만히 잘도 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