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도 1학기 <아시아 현대미술 작품분석연구> 수업 기말 과제로 가상 전시 기획을 해보았었습니다.
아르코 미술관으로 장소를 선정했고, 이미지는 저작권 관계로 따로 업로드하지 않습니다.
글 아래 참고문헌에 표기해둔 작가 홈페이지 링크 참고해주세요.
UNCANNY AURA (언캐니 아우라)
Truong cong tung(쯔엉 꽁 뚱) 개인전 기획
서양화과 서양화 전공 김륜아
전시 서문
흙 속의 흰개미
베트남, 한국. 근대의 모순과 균열
한국과 베트남은 그 역사에 있어서 닮아있다.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위협받았고,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고, 그 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동시에 근대화되었고,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동질적인 민족 이데올로기가 강조되었으며, 냉전 질서 속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나라가 분단되었고, 그 결과로 내전이 일어났다. 차이가 있다면 베트남은 프랑스나 미국 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그 결과로 공산 국가가 되었으며, 군사독재가 끝난 한국과 달리 현재도 정부의 독재 하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수면 위로 드러나는 역사 뒤에는 애매모호하고 반투명한 부분들이 존재한다. 식민지배를 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근대화가 되었다는 점, 제국주의 국가의 것이 곧 새로움을 뜻했다는 것은 근대에 대한 모순적인 감정을 품게 했다. 식민지배에 의한 근대화 과정은 외부 세계에 대해 느끼는 모순된 감정뿐 아니라, 후기 식민 국가 내부에 겉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균열을 초래하기도 했다. 베트남은 독립운동을 위해 본질적으로 동질적인 민족임을 강조했지만, 사실 베트남은 참파로 대표되는 독자적 소국들과 캄보디아를 침략하면서 영토를 넓혀왔기에,[1] 베트남은 여러 민족이 섞인 구성이다. 하지만 식민지 시기와 내전을 겪으며 독립 운동을 더 잘 이끌기 위해서라는 명목 하에 비엣족이 아닌 다른 소수민족은 지워지고 차별 받았다. 2021년 현재까지도 베트남에는 중부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끔찍한 소수민족 박해가 벌어지고 있다. 베트남처럼 독립 과정에서 동질적인 민족성을 강조했던 한국 사회에도 비슷한 문제들이 있었다. 2018년에는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을 당시 민간인을 학살한 것에 대한 진상규명 법정이 열렸다.[2] 이제는 사회의 일원이 된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의 존재를 지우고 차별하기도 한다. 외부에 대한 모순적인 감정들과 내부의 균열들, 이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은 대다수의 국가들이 공유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감정과 균열은 미술의 영역에서도 형성되었다. 베트남과 한국 모두 식민지배를 받는 시기에 최초로 근대 미술의 개념이 도입되었기에 근대라는 개념의 문제를 겪었다. 당시 근대 미술이란 베트남에게는 프랑스 미술, 한국에게는 일본을 통해 수입되는 서구의 미술을 뜻했다. 아무래도 한국의 경우 이중의 수입을 거쳤기에 베트남보다 반응이 느리게 나타나는 경향은 존재했으나, 두 나라 모두 근대화라는 새로움에 저항해야 할지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복잡한 고민의 과정을 거쳤다. 베트남의 경우. 식민시기 프랑스 선교자에 의해 로마철자화된 베트남어가 도입되고 널리 쓰이게 되면서, 프랑스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 어느 정도 전통과 단절하는 것이 오히려 민족적 정체성을 잇고 모더니티를 추구하는 길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서구 근대미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통을 세우려는 모더니즘 운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압되었다. 일례로 1951년 베트남 최초의 큐비즘 개인전을 열었던 따띠는 호치민이 이끄는 저항군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간부들에게 모욕을 받아야 했다. 공산당에게 인정받는 미술은 오로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었고, 이러한 경향은 1954년 제네바 회의로 나라가 북위 17도 선상에서 분단되고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이 성립하면서 더 강화되었다.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아방가르드란 모더니즘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었으며,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공산주의 개념과 결부되어 오염되었다.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에는 계속 모더니즘 운동이 존재했으나, 길어지는 내전으로 점차 냉소적이 되었고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이 나라를 통일하면서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의 모더니즘 운동은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호치민 미술관과 하노이 미술관의 근대미술 소장품에는 오로지 반미 전쟁 작품들과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작품들만이 존재한다. 이들 미술관은 국가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베트남 미술사의 반쪽만을 제시하고 있다. 미술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위한 수단이 되고, 그 외의 미술은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은 한국에도 존재했다. 독립운동 시기와 독재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 시기에,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비판이 존재했다. 다만 한국의 경우 베트남처럼 공산화되지 않았고, 독재정권이 계속 유지되지도 않았기에 미술과 삶을 잇는 시도가 끊기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다. 한편, 90년대의 국제화 시기에는 두 나라 모두 다른 아시아 나라들처럼 변화한 세계에 발맞춰 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이게 됐다. 특히 공산국가인 베트남의 경우, 1986년 베트남 정부가 도이모이(개혁) 정책을 통해 시장경제를 일부 수용하면서부터야 국가의 입맛에 맞추지 않는 대안적 미술공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안 공간은 실질적으로 국립미술관이 해야 할 일을 수행했으며, 90년대부터 크게 성장해 작가들에게 실험적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할 공간을 제공했다. 여기에는 베트남 전쟁 이후 검열을 피해 해외에 나가서 정착했던 해외의 베트남 미술가들의 도움이 컸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