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륜아
‘표현’이라는 말 속에 내포된 비웃음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표현적인’ 그림을 계속해서 생산하는가? 이때 전제는 모든 그림은 생물이 남긴 흔적들로 만들어진 무생물이라는 점이다. 이중에서도 표현적인 그림은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 즉, 촉각성이 강조되는 부류의 무생물이다. 만지면 질척거릴 것 같고, 온도를 지닐 것 같고, 그린 사람의 움직임을 상상하게 하는 등 살아있는 것의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결국은 무생물인 것이 이런 종류의 그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부류의 그림들은 따뜻하고, 생생하고, 감성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흉하고, 소름 돋고, 기분 나쁜 종류의 것에 가깝다.
이러한 회화적 회화 작품들과 더불어서, 시각 문화의 이미지 아카이브에 반응하여 만들어지는 일련의 회화 작품들 또한 음침한 부분이 있다. 이미지에 반응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작업들은 대부분 사진과 밀접하게 엮여있어 본질적으로 언캐니하다. 이런 작업에서 작가는 한때 존재했던 과거, 편집된 과거라는 가상을 토대로 죽은 것을 만든다. 다시 말해, 이미 죽은 걸 또 한 번 죽게 만든다. 이러한 시도는 시각 문화 아카이브의 무한함 탓에 무한동력 장치처럼 강박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확인사살의 과정에서 사후경련의 움직임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게 되는데, 이런 지점이 이미지에 반응하는 회화가 지닌 기분 나쁜 점이다.
서로 겹쳐지기도 하는 두 가지 회화 경향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생물을 흉내 내는 기괴한 무생물’의 모습이다. 흔적 남기기와 이미지에 대한 반응, 두 경향의 차이는 존재한다. 전자에서 화가는 자신이 조작했을 때는 움직이는 것으로 느껴졌으나 결국은 죽은 것을 만든다. 말하자면 자동인형, 실패한 버전의 피그말리온 같은 것을 만든다. 후자에서 화가는 과거의, 혹은 가상의 무생물의 특성을 토대로 현실에서 무생물을 만든다. 이 경우, 화가는 여러 곳에서 시신을 도굴하여 시체인형을 반복해서 만드는 사람이다. 전자에서 화가가 이미 죽은 것을 살아있는 것을 대하듯 학대하는 새디스트라면, 후자에서 화가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달리 시체인형이 자의식을 지니게 하는 데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강박적 장치가 되기를 자처하는 매저키스트다.
그래서인지 다 그려진 그림을 보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일, 그려지고 있는 그림을 보는 일보다 재미 없는 일이다. 다 그려진 그림은 그려지는 동안 잠깐이나마 얻었던 허위의 생을 잃고 죽어있다. 회화 전시를 보는 일은 19세기 프랑스의 공시소를 관람하는 일과 닮아있다. ‘시신의 가족을 찾기 위해서’와 같은 변명 아래 사람들은 죽은 것을 보고 쾌를 느꼈다. 나는 근래 들어 회화 전시를 잘 보러 가지 않게 되었다. 나는 공시소에서 시체를 즐겁게 관찰하겠지만, 공시소를 나설 때 나의 어떤 부분을 잃은 기분을 느껴야 할 것이다. 나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들어낸 인형의 본질을 알고 싶지 않다. 생물인 척하는 무생물이란 곧 모두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겁쟁이 강아지 커리지>의 “퀼트 클럽” 에피소드는 상징적이다. 커리지의 주인 할머니는 퀼트 클럽에 가입했다가 그만 고대부터 사람을 퀼트로 꿰매서 영생을 살아온 샴쌍둥이 자매의 옷감에 꿰매져 붙잡힌다. 어릴 적 접한 이 에피소드는 현재까지도 내게 공포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산 사람을 죽은 것으로, 납작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커리지는 자기 가죽을 할머니가 붙잡힌 퀼트에 연결해 할머니와 다른 사람들을 구출하고, 역으로 샴쌍둥이가 퀼트 속에 붙잡힌다. 납작한 2차원의 화면, 그곳에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을 나타내려는 것 자체가 공포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지배권을 잃고 내 몸이 전부 다 꿰매어진다면, 그때 자신을 꺼내줄 사람이 없다면, 그건 곧 죽음이다. 죽음의 공포에 매혹되는, 징그러운 사람들만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덧붙임 하나, 디지털의 화면에 대하여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기분 나쁜 것(촉각적 회화)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질감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미끈한 디지털 화면에서조차 이러한 촉각성을 모방하려 한다. CG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캔버스에 칠해지는 붓질의 느낌을 흉내 낸 디지털 브러쉬를 만들어 촉각성을 시각적으로 재현한다. 촉각성의 시각적 재현이라는 점에서 이는 뵐플린의 개념을 떠올리게 하지만, CG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모방하는 붓질은 사물의 질감이 아니라 붓질의 추상적인 촉각성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나 또한 최근의 다른 작가들과 비슷하게, 한동안 작업 과정에서 디지털 드로잉을 응용했다. 디지털 화면에서 붓질을 흉내 낸 브러쉬로 미리 그려본 뒤, 본 작업에서도 디지털 드로잉 속 붓질의 느낌을 살리려고 했다. 이런 과정은 화면의 밀도 차이를 없애고, 그림을 납작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디지털 화면에서는 깊이의 환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디지털 화면의 모든 픽셀은 동일한 빛을 받아 동일한 정도로 발광한다. 캔버스에서는 실제로 붓질이 쌓일 수 있기에, 깊이라는 환영은 신뢰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디지털 화면에서는 그렇게 믿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다소 이상하게 보일 만큼 긍정적인 것에 대해서, 절대적인 믿음의 유무 차이가 크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진실이든 아니든 믿을 게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다. 나는 디지털 화면을 다룰 때, 티끌도 없이 사라질 것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실제로는 물리적 형태가 있는 회화 또한 소실의 위험이 있고, 오히려 인터넷 상에 업로드된다면 삭제되기 힘든 것은 디지털 데이터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단순히 물리적 물질과의 접촉이 중요한 걸지도 모르겠다. 만져봐야만 믿을 수 있다. 변화한 현실과는 맞지 않더라도, 인간은 만져봐야만 믿는다. 촉진이라는 관찰 행위는 사실 비과학적이고 종교적인 믿음에서 기인했다. 회화라는 종교는 촉진의 믿음이 사라질 때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
#덧붙임 둘, 회화와 조각의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