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 뒤의 누드를 집다

『디트마어 엘거, 게르하르트 리히터 영원한 불확실성』 서평

김륜아

『게르하르트 리히터 영원한 불확실성』은 미술사학자 디트마어 엘거의 책이다. 그는 현 드레스덴 국립 미술관 게르하르트 리히터 아카이브의 책임자이자, 과거 리히터 작업실의 비서였다. 이러한 이력을 바탕으로 리히터의 작품을 집대성한 『카탈로그 레조네』(1986)를 저술하기도 했다. 이 책은 생각보다 오래된 책으로, 2002년에 초판, 2008년에 재판, 2018년에 3판이 나왔다. 이번 2024년 을유문화사에서 출판된 책은 가장 완성도 높은 3판을 번역한 것으로, 철학과 독일어를 전공한 이덕임 번역가의 물 흐르듯 읽히는 번역이 일품이다. 리히터를 추적해온 원 저자의 약력답게, 이 책은 1960년대 이후 정치사회적 상황 속에서 길을 잃은 것으로 보였던 회화를 지속할 방도를 끈질기게 고민했던 작가 리히터의 일대기를 다룬다. 저자는 겉보기에는 일관되지 않은 리히터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일관적 특성으로 ‘불확실성의 추구’를 제시한다.

이 책이 2024년 한국에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리히터의 특정 스타일(이를테면 사진회화)로 작업하는 학생들은 십여 년 전부터 한국 미술대학에 존재했으며, 현재도 회화의 주관성을 배제하여 회화를 지속 가능한 매체로 만들고자 하는 리히터의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젊은 작가들이 대거 존재한다. 인간을 둘러싼 시각문화가 더 복잡하고 방대해졌음에도 사진의 속성을 회화에 대입하여 회화의 복권을 시도한 리히터의 작품은 아직도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이는 아마도 그의 주제의식과 방법론이 현재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도 통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리히터의 신진작가 시절부터 최근까지 작품세계 변화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이 책은 그의 작품 변천사의 원인결과들이 현 시대 작가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려주며, 대가의 환상을 긍정적으로 부순다. 이 책은 독자에게 변화는 고민을 그만두지 않는 것에서 온다는 진리를 말해준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리히터의 작품의 일대기이고, 두 번째는 리히터라는 인간의 일대기다. 저자는 주관성을 배제하면서도 회화를 지속하려는 시도, 회화의 종말 이후 회화를 지속할 방도를 찾아나간 리히터를 인터뷰하고 그의 작품세계를 집대성한다. 사진회화, 풍경화, 컬러패널, 추상회화, 유리 설치작품 등 비일관적으로 보이는 스타일의 변화를 불확실성을 추구한 일관적인 행보로 분석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리얼리즘으로 불렸던 초기 사진회화와, 팔레르모와 리히터 본인의 두상 조각 작품은 정말 멀어 보이지만 반골정신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초기 사진회화는 자신을 포함한 당시의 소부르주아를 비판하는 것이며, 두상 작품은 당시 요셉 보이스로 대표되는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과 모든 사람은 예술가라는 시대정신에 반하는 것이었다.[1] 나아가 회색회화와 컬러 추상회화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화가의 주관을 배제했다. 리히터는 자신의 작업을 회화로 명시하는 동시에 모든 회화적 관습을 거부하며 붓질에서 주관성을 배제하고 표면과 구성의 위계를 없앴다.[2] 이런 측면에서 추상회화는 느닷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다. 스퀴지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작업 영상으로 대표되는 리히터의 추상회화는 회색회화와 정반대 방향에서 회화를 독해 불가능하게 한다.[3] 끊임없이 만들어낸 스타일을 반대방향 혹은 빗겨간 방향에서 부딪히는 리히터의 행보는 저자가 인용한 리히터의 말로 잘 설명된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대신 존재하도록 내버려두자. 진정으로 더 풍부하고 더 생생한 것, 나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주장과 구성, 창조와 발명, 이데올로기는 필요 없다.”[4]

이와 같은 측면과 함께 다뤄지는 것은 불확실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모순적 면모다. 존재는 그 자체로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미립자는 관찰될 때와 관찰되지 않을 때 그 모습을 달리한다. 작품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가 한 작품을 이루고 있으므로, 후자를 리히터의 삶을 통해 분석한 저자의 시도는 탁월하다. 미술사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회화의 복권을 위해 상반되는 스타일의 변화를 반복한 것으로 보이는 리히터지만, 한 인간 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 변화의 계기가 항상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책에 따르면 리히터는 매우 예민하고, 상처 입기 쉽고, 생각이 많고, 인간적인(다시 말해 조금씩 세속적이고 조금씩 모순적인) 인물이다.

리히터는 파시즘을 경험했으며 동독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파시즘과 동독에서의 경험은 이데올로기와 확실한 무엇을 회피하는 성향을 만들어냈다. 그때그때마다 미술계의 지배적인 경향에서 엇나가는 것에는 작업적 측면뿐 아니라 확고한 표명을 기피하는 심리적 요인도 작용했을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행보는 아버지상에 대한 결핍[5]과 어머니의 양육태도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정 중독과도 이어진다. 리히터는 인정 받고 성공하기 위해 현실적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동독에서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서독으로 이주했다. 대학에 새로 입학하고 전시 커리어를 쌓고 인맥을 쌓았다. 아틀라스와 카탈로그 레조네 등 작업 자료와 작품 목록을 초기부터 정리했다. 그렇게 그는 경제적 안정, 미술계의 인정, 작가 자신의 만족, 회화의 즐거움을 하나하나 얻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씩 얻어갈수록 하나씩 포기할 수 없어지는 그의 모습은 참 인간적으로 그려진다.

특히 리히터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 회색회화다. 대학 교수로 재직하는 중 프리드리히의 <난파된 희망>를 자신의 개인적 상황, 결혼생활의 위기로 느낀다. 이러한 그의 개인적 위기는 그린란드의 빙하, 그리고 회색회화로 나타난다.[6] 예술성이 없으며 무의미한 결과만 나온다고 생각했던 회색의 덧칠 작업은 회색 영역의 질적 차이가 더 뚜렷한 회화적 특성을 보여주었고, 리히터는 그림으로부터 이러한 행위에 자신이 생각했던 파괴적 동기가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7] 또한 비판과 반응에 민감한 리히터의 모습은 책 내내 묘사되지만 특히 이 회색 회화에서는 스스로 “감정과 슬픔이 있는 그림”으로 설명함으로써 비판을 유난히 방어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8]

이처럼 이 책은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듯 자세하고 생생하게 당대 미술계와 그 속의 리히터를 묘사한다. 슈멜라 전시회 오프닝에서 폴케와 함께 남들과 떨어진 자리에 앉아 속상했던 일화[9], 작가로서는 자기보다 잘나가지 않았던 콘라트 루에크의 유명한 갤러리스트로의 변신에 대한 복잡한 감정[10], 여섯살 어린 시그마르 폴케와의 불화와 회복(그리고 다시 불화)[11], 갤러리와의 협상과 소통 부재 문제[12], 도큐멘타 압력에 굴복하고 이런 권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프랭크 스텔라에게 가려져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끼는 일화[13] 등이 그렇다. 이 책은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기 보다는 지금까지의 해석들을 정리하는 성격이 강하지만, 리히터를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모두 이해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훌륭한 책이다.

결과적으로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사진회화, 컬러패널, 추상회화 등 얼핏 전혀 연결되어 보이지 않고 상반돼 보이는 스타일의 작품들이 회화를 계속하기 위한 작가의 고민이라는 점에서 일관된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저자의 생생한 기억과 꼼꼼한 자료조사를 토대로 독자에게 손에 잡힐 듯이 전달되며, 나아가 미술사적 의미뿐 아니라 리히터 개인의 생애와 심리가 모순적으로 보이나 인간 본질 측면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 또한 제시한다.

저자는 불확실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화가의 성격적 측면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인정중독, 아버지상에 대한 결핍. 화가의 모든 말은 기록되어 의미를 부여 받는다. 후대에 책을 읽는 독자는 한 사람의 작품세계를 총망라할 수 있다는 달콤함 속에서 베일에 가려진 채 구석구석 헤집어지는 화가를 구경한다. 베일 뒤에서 사학자에 의해 헐벗은 화가는 명목상 베일로 가려졌을 뿐 꼭 베일로 몸이 잡힌 형상으로, 거의 보이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럼에도 가려진 것은 가려진 것이다. 저자의 분석이 닿지 못한 부분, 잘못 닿은 부분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미술애호가이자 화가로서 앞으로도 작가에 대한 글에서 저자의 손길이 잘못 닿은 부분, 닿지 못한 부분이 존재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