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기획을 위해 작성했던 글입니다. (해당 전시는 기획이 변경되어 이 글은 쓰이지 않을 것 같아 올립니다.)

2024.10.28

김륜아

현 인류는 고대의 인간으로부터 얼마나 달라졌는가? 시대가 변했음에도 회화는 왜 여전히 생산되는가? 인간의 근본적 본질과 세상의 근원적 양극성―인간의 기준으로는 선과 악이 혼돈돼있으나, 자연의 기준으로는 그 자체로 존재함이 당연한―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유발된 두려움에 대처하기 위해 인간은 원형적인 상을 만들어왔으며 이는 주술, 종교, 문학 등의 분야에서 계속 잔존했다. 연극을 통한 몰입과 의식(ritual)의 과정은 고대 인간에서부터 현 인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사고방식을 관통한다. 회화는 화가의 가면으로써, 주술이나 종교와 닮아있는 ‘연극’을 위한 매개체다. 즉, 본 전시는 회화가 “거리를 둔 채 이루어지는 가짜 제의, 일종의 연극(을 구성하는 물질)”이라는 점에서 계속될 것이다.

화가가 예술을 행하는 동기는 동굴에 살던 원시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왜 이 세계에는 파괴와 죽음, 고통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가?”[1] 왜 어느 때는 비가 와서 곡식이 풍년이고, 다른 때는 홍수로 수많은 인간이 죽는가? 왜 너무 더워 사람이 죽는 해가 있는가 하면 너무 추워서 생물이 살 수 없는 해가 있을까? 인간의 생존을 약속하고 동시에 파괴하는 세계의 근원적 요소들은 양극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들을 상징하는 이미지들도 양극성을 띤다. 예를 들어, 바르부르크의 <뱀의식 강연>에서 뱀은 인디언들에게 공포의 상징임과 동시에 비를 내려주는 번개의 상징이며,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악의 씨앗이면서 동시에 모든 병을 치유하는 청동 뱀의 지팡이로 등장한다.[2] 광기에 사로잡힌 디오니소스의 ‘마이나데스’라는 이교적 상징은 홀로페르네스의 잘린 머리를 든 유디트로 이어져 초기 르네상스의 전형적 형상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3] 인간의 심연에서 솟아올라 그 심연을 표현해내는 이미지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이미지로 응축하는 에너지를 갖고 있으며, 그래서 계속해서 살아남았다.[4] 화가가 다루는 이미지는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이러한 양극성에 대처하는 인간의 생존방식을 보여준다.

원시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현대의 예술가는 특정 목적을 위해 제의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화는 인간 경험에 각인된 이미지들에 거리를 두고 치러지는 가짜 의식에 필요한 매개체이며, 이 매개체는 그 자체로 자율적인 객체다. 그레이엄 하먼은 <예술과 객체>에서 최초의 예술은 가면이었을 거라고 주장한다.[5] 인간 객체는 가면이라는 예술 작품 객체 뒤로 사라져 혼성 객체가 되는데, 객체로서의 예술 작품에는 그 작품이 놓인 상황(모든 상황이 해당되지는 않는다)과 감상자도 포함된다.[6] 그래서 하먼은 마이클 프리드가 구별하여 설명한 몰입과 연극성을 똑같이 긍정적인 가치로 취급한다. 그는 직서적인 것(the literal)에 대한 반감은 프리드와 궤를 같이 하지만, 연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프리드와 달리 예술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7] 아비 바르부르크 또한 <뱀 의식 강연>에서 원시 문화의 논리적 행위로서 일체화 행위를 설명한다. 그는 일체화 방법을 셋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첫 번째는 주체가 남고 대상이 사라져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대상의 일부가 주체에 속하는 낯선 물체로 보존되는 ‘부분 일체화’로,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 대표적 사례다. 마지막은 도구를 다루거나 몸에 걸치는 그 사이로, 예를 들면 대상 속에서 인간이 자신을 잃어버리는 가면 춤 제의가 있다.[8]

회화는 인간이 붓으로 몸을 늘여서 만들어낸 연극을 위한 가면이다. 빈 캔버스에 대한 공포와 경직된 저항의 몸짓은 가면의 눈 구멍으로 세상을 보는 것으로 극복된다. 인간은 도구를 다룸으로써 자신의 윤곽을 비유기체로까지 확장한다.[9] 손은 대상의 외적 윤곽을 따라가는 일 외에 대상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고, 그러므로 예술행위란 곧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를 눈으로 받아들이고 손으로 붙잡는 일이 된다.[10] 종교가 사라진 시대에 예술은 종교의 역할을 대체한다. 발전된 종교에서 점점 거리 두기가 드러나듯, 예술 작품에서 거리 두기는 필수적이다. 거리를 둔 채 이루어지는 몰입과 연극은 예술가와 감상자 모두 이 상황이 가짜라는 걸 안다고 전제한다. 그럼에도 서로 합의를 본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 작은 연극은 몰입을 이루어내고 성공적으로 예술적 경험을 만들어낸다. (일상 속에서 예술적 경험을 할 수도 있고, 전시장에서 예술적 경험을 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이는 연극이 얼마나 성공적인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작가는 모두 몰입과 연극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세상으로서 그림을 생산한다. 바르부르크의 일체화 방법분류에 의거해 작가들을 투박하게 묶어볼 수 있다. 단, 카톨릭의 영성체의식처럼 주체가 남고 대상이 사라지는 첫 번째 방식은 현대 회화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하나님의 육체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가 신자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듯, 화가가 만들어낸 것이 그 원료―상이 되었든 물질적 재료가 되었든―가 사라지게 할 순 없다. 회화가 물질이 아닌 현실과 같은 환영으로 여겨진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이 시대에는 어려운 일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방식은 한 그림 안에서 섞이곤 하지만 거칠게 분류해보겠다.

(작가 설명)

이처럼 작가들은 각기 다른 연극을 상연하지만 무대를 만드는 과정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제단화는 성실하게 쌓아서 그린 그림이다. 성실한 밀도는 화가의 몰입을 보여주는 척도다. 밀도는 그림을 그리는 물리적 시간보다도 얼마나 많이 몰입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단시간에 그려내도 화가의 자아를 손, 손과 연결된 붓, 붓이 닿는 화면에 내어주는 정도에 따라 그림은 몰입할 수 있는 세상이 되거나 그렇게 되지 못한다. 화가는 생산자이자 동시에 그림에 가장 잘 몰입하는 감상자다. 비유적으로 말해 화가는 연기하는 동안은 자신이 연기를 한다고 느끼지 못하는 연극의 배우와도 같다.[11]

바르부르크는 <뱀 의식 강연>에서 괴테의 <잠언과 성찰>의 구절을 인용한다. “눈이 태양을 닮지 않았더라면 태양은 눈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12] 바르부르크는 이 구절을 기억에 의거해 인용하였고, 그래서 괴테의 책에 정확히 같은 문장은 찾을 수 없다. 그나마 비슷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했다고 예술을 경멸한다면, 자연 또한 다른 것들을 모방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예술은 눈으로 보이는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구성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이유의 요소들을 모방하는 것이다. 또한 예술은 그 자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을뿐더러,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이 완벽하게 채우지 못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을 메운다. 페이디아스(Pheidias)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을 조각할 수 있었던 것은 제우스(Ζeus)가 우리 눈앞에 오면 어떤 모습일지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3] 즉, 인간을 둘러싼 상징―원형적 이미지들―은 파괴되지 않을 것이고, 인간은 무수히 많은 가상과 현실의 이미지를 접하며 상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그것을 모방하기만 한다거나 그것에 종속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눈이 부셔도 태양을 따라 윤곽을 그릴 수 있다. 회화라는 가면은 화가의 몸을 확장하여 눈부신 태양빛 속에서도 태양의 윤곽을 그리게 한다. 회화는 언제고 새로운 대안을 창출해내는 변증법적 결과물인 적이 없었다. 회화는 항상 인간 본능으로 치러지는 제의를 위한, 그러면서도 그 자체로 자율적인 토템[14]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