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도스에서의 개인전 (2024.7.10~7.16)을 위해 쓴 글입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동안 쓴 글들을 전시의 주요 소재인 풍경에 맞추어 정리한 내용입니다.
김륜아
우리는 과거와 달리 수많은 이미지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조작되고 만들어진 이미지는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자연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가상의 재현이 실재의 재현보다 질이 낮다고 말하기에는 이제 삶 속에서 실재와 가상은 비슷한 정도로 혼재돼있다. 회화는 진정 다른 이미지들보다 생동하는가? 무수한 이미지들에 아무런 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회화는 화가가 인식한 세계를 재현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며, 화가는 오감으로 느낀 것을 몸으로 화면에 구현하는 사람이다. 무언가를 보고, 에너지를 느끼고, 그리는 행위는 인간에게 있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게는 추상도 구상도 감각한 세계를 재생산한 그림이다. 내가 그리는 추상은 가상과 현실의 이미지들의 무작위적인 집합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드로잉을 토대로 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현대인이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로부터 소진된다고 느꼈다. 나는 몸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드로잉을 바탕으로 그림을 제작하여 적어도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소외되지 않고 살아있음을 느끼고자 했다. 한편, 여행에서 보고 느낀 자연을 토대로 그려지는 다소 구상적인 그림들은 몸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는 과정에서 왜곡됐다. 고정된 시점에서 바라본 하나의 풍경이 아니라 몸으로 움직이면서 직접 경험한 자연을 재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희미한 이미지가 되어가는 경험을 다시 단단한 실재로 붙잡았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시대에 표현주의는 미술계에서 고루한 단어가 되었다. 이제 표현주의 회화의 표면은 화가의 감정 표현의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그 화면을 일단 믿는다. 한동안 작업을 그만두고 세계를 여행하면서 나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유명 관광지의 사진은 전세계에 수 만장이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그 장소에 직접 방문하려고 애를 쓴다. 자신의 몸이 거기에 있었다는 기억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짜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들은 그것이 가짜임을 밝혀내는 기술 또한 함께 개발한다. 그 순간 살아있었음을 증명하는 기억 속 광경은 그 어떤 사진보다 오래 존재한다.
가상과 실재가 아무리 구분되지 않는 시대라고 해도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가상을 실재로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인간이 고갈될 때 이를 치유해주는 건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 곁에 실재해온 자연이다. 인간과 인간의 본능적인 그리기 행위는 자연에 속한다. ****반면 그림은 인공물에 가깝다. 물론 인공물은 인공물 나름의 좋음을 지닌다. 인간은 문명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문명으로 소진된 인간은 자아를 지워야 치유될 수 있다. 인간은 나고 자란 현실이라는 토대를 벗어날 수 없다. 현실을 벗어난 인간은 정신적 미아가 된다. 여행으로 현실에서 직접 몸으로 자연과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의 중요성을 깨달았기에 나는 다시 붓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풍경화 시리즈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