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ADAVERDA
본 글은 동명의 개인전(2025.2.8~2.28, 코소)을 위해 쓴 글입니다.
25.1.19
김륜아
카라데바다는 일본어로 몸을 말하는 카라다(体)와 의학 해부실습용 카데바(Cadaver)의 비슷한 발음에서 착안한 말장난 합성어다. 体는 몸 체자의 속자로 쓰이는데, 거의 쓰이지 않는 원래 뜻은 ‘용렬한 분’이다. Cadaver는 쓰러진 것을 뜻하는 라틴어 ‘Cadere’에서 유래했다. 비약하자면, 인간의 몸은 분출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쓰러질 예정인 것이다. 몸은 태어남과 동시에 바로 죽어간다. 장 뤽 낭시에 따르면 우리가 몸을 이야기할 때, 몸은 몸에 있지 않다.[1] 살아있는 동안 몸은 항상 망자의 몸이며[2], 우리는 오직 타자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표피로서 접촉해야만 자신의 몸을 인지할 수 있다.[3] 중국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가장 그리기 쉬운 것은 귀신, 가장 그리기 어려운 것은 사람. 이 말은 실재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그려놓든 그것이 틀렸는지 알 수 없는 반면, 매일 보는 사람은 잘못 그려 놓으면 어디가 이상한지 다들 안다는 뜻이다. 타인의 몸과 그 이미지들은 이렇게나 잘만 보면서 자신의 몸의 노화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은 유일하게 자신의 몸에 적응하지 못한 부끄러운 생명체다.[4] (자화상은 눈을 거울로 돌렸다 다시 캔버스로 돌리는 행위를 반복하게 하므로, 전신을 다 드러내기 어렵다.)
2021년 나는 “시체애호가로서의 화가”에서 회화를 자동인형, 실패한 피그말리온, 실패할 프랑켄슈타인 등으로 묘사했고, 생물인 척하는 무생물이란 결국 모든 인간의 미래이므로 회화는 기분 나쁜 것, 그런 회화에 매혹되는 화가를 기분 나쁜 사람으로 묘사했다. 지금은 약간 생각이 바뀌었다. 무생물도 자연의 일부이며 살아있다. 메두사가 만든 석상을 생각해보자. 메두사는 대상과 시선을 마주친 순간 대상이 몸을 확장하지 못하게 정지시키고 오직 눈의 자위 행위만을 남긴다.[5] 대상은 메두사를 눈으로 훑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메두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녀를 관통하지 못하고 그녀의 몸에 미끄러져 들어갈 뿐이다.[6] 메두사 또한 돌이 된 대상을 부숴버릴 수는 있어도 더 이상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다. 폼페이의 화산재가 속을 녹이고 껍질만 남겼듯이, 이제 그 안에 꼬집을 수 있는 살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괴하지 않을 셈이라면 그저 바라보고 더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고 손으로 옮기는 행위인 회화는 움직이는 몸을 포착하려 하지만 항상 굳은 몸을 윤이 나게 매만질 수밖에 없는 행위다. 이때 감상자는 돌이 될지 모르는 두려움을 감당하며 메두사와 석상이 된 몸을 바라본다.
뒤늦게 내가 왜 회화의 생동하는 물질성을 사랑하면서도 “시체애호가로서의 화가”같은 자조적인 글을 썼는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부분이 있다. 당시의 나는 자동인형도 살아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나는 발튀스(Balthus), 모란디(Giorgio Moradi)의 작품처럼 한 부분 한 부분 차근차근 쌓아서 그린 그림들이 전부터 좋았다. 이런 그림들은 경직돼있으나 동시에 살아있다. 발튀스의 카탈로그 레조네에 실린 쟝 클레어(Jean Clair)의 글은 발튀스의 차별점이 그 이전, 이후 화가들처럼(데 키리코, 초현실주의자들 등) 모더니티의 상징인 자동인형을 다루면서도 관객이 이에 매혹되지 않게 하는 점에 있다고 설명했다.[7] 기술문명에 있어 인간과 같은 자동인형은 고대 정복자의 석상이 주는 공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SF가 주는 매혹의 대상이다.[8] 그런데 발튀스는 그러한 대상에 인간적 요소를 부여해 공포와 매혹을 줄여나갔다. 그는 과거의 회화 기술을 공부했으며, 당시 갓 태어난 기계문명의 완벽함을 거부하고 그림에 항상 인간적 요소를 넣었다.[9] 공중을 부양하는 마리오네트가 생각지도 못하게 중력의 질서로 대표되는 인간의 질서를 따르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10] 그의 작품이 종종 변태적 에로티시즘으로 해석되는 이유는 이러한 사정 때문에 작품 속에 목격자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11] 그의 그림에서 목격자는 살아있는 대상을 마네킹으로 바꾸는 능동적인 참여자다. 그가 그린 나무 박스 같은 소녀의 몸통은 소녀를 마리오네트로 바꾸고,[12] 그 마리오네트는 마치 인간의 질서를 따르는 것처럼 그려진다. (나는 인간 발튀스에는 관심이 없다. 화가들의 속사정을 알아 봤자 좋을 게 없다. 나는 쟝 클레어의 위와 같은 해석을 좋아한다. 그리고 발튀스 그림의 좋은 점만을 취할 것이다.)
분출하면서 죽어가는 것. 인형이지만 사람처럼 구는 것. 찰흙을 굳혔다가 물을 뿌려 다시 약간 유연하게 하는 것. 반죽일 때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던 흙과 빵이 건조되면 변형에 한계가 있는 것. 그럼에도 여전히 변형될 여지가 있으며 자연의 질서에 속하는 것. 이것이 내가 물감과 붓과 그림을 사랑하는 이유다. 사뮈엘 베케트는 “장애의 화가들”에서 두 종류의 예술가를 묘사한다. 대상-장애 예술가는 대상은 대상 그 자체일 뿐이므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시선-장애 예술가는 나는 그저 나 자신일 뿐이므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13] 나는 아직도 이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전자는 몸은 그저 몸일 뿐인데 석상이 된 몸을 보고 그린다 한들 몸이 재현될 리 없다는 것인가? 후자는 나의 몸은 그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몸뚱이일 뿐인데 타인의 시선으로 몸을 보고 그린다 한들 몸이 재현될 리 없다는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이 부분에서 느끼는 것은 불가능에서 오는 절망감과 이를 즐기는 화가의 아이러니한 태도다. 그런데 베케트가 설명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 이런 분류법 따위 생각나지 않는다. 생동하는 무생물, 카라데바다를 만드는 즐거움만이 떠오른다.
[1] 장 뤽 낭시, 김예령 옮김, 코르푸스―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문학과 지성사, 2012, 10p.
[2] 같은 책, 1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