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지의 회화 작품에 대해서

(이예지 작가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eeye.ji/)

2025.2.16

김륜아

점, 선, 면의 구별은 어떤 그림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보통 점이 쌓이면 선이 되고, 선이 쌓이면 면이 된다고 하지만, 점을 크게 확대하면 면이 되고 굵은 선은 그 자체로 면의 성질도 지닌다. 점, 선, 면의 구별보다는 형태에 종속적인가, 독립적인가가 더 쉬운 구별일 것이다. 서양미술사에서는 오래도록 형태를 따라가는 선(disegno)을 그렇지 않은 색(colore)보다 중시해왔다. 그 자체로 오묘한 힘을 가진 색은 그림에 필수적이긴 하나 형태를 방해하거나 형태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한편, 한동안 서양 미술사에서 폄하됐던 근대 이전 동양의 그림에서는 ‘형태를 구축하는 붓질’과 ‘형태를 채우고 색을 전달하는 붓질’이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저마다 다른 깊이를 지닌 먹의 붓질은 형상을 이루기도 하지만 그 자체의 방식으로 공간을 메우는 독립적인 붓질이기도 하다. 굳이 따지자면 수묵화에 존재하는 것은 각기 다른 농도와 세기와 질감을 지닌 고유한 몸짓들일 것이다.

이예지의 그림을 보면 그런 고유한 붓질이 떠오른다. 이예지의 그림은 따지자면 구상적이고, 형태를 이루는 선이 존재하고, 그 선을 색들이 분명히 채우고 있음에도, 그의 그림에서 먼저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른 붓질들이다. <Your Darkness Could Eat up My Sins>(2024)에서 서 있는 들개와 그의 어둠은 형태의 차이가 아닌 붓질의 차이로 구분된다. 붓질의 차이는 천의 질감, 물감의 마른 정도, 목탄의 세기, 작가의 손의 압력 등 다양한 요소로 생겨난다. 서 있는 들개는 천의 올이 살짝살짝 보이는 붓질, 얇고 강하게 바짝 선 털을 표현하는 목탄의 획들, 흰색 아크릴 물감이 목탄 가루와 섞여 툭툭 엉켜진 털들로 이루어진다. 반면, ‘나의 죄를 잡아먹을’ 거라는 들개의 그림자는 서 있는 들개의 귀와 음영이 진 몸에서 시작하여 바닥에 이르기까지 천의 올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강하게 문질러진 목탄 자국과 얇은 아크릴 물감 위에 강하게 그어진 목탄의 선들로 채워진다. 화면을 처음 봤을 때 관객은 서 있는 들개와 눈이 마주치지만, 곧 그 몸의 털을 훑다가 검고 강한 귀와 다리에 눈이 꽂히고, 그렇게 왼쪽으로 내려간 시선은 그림자 속에서 번뜩이는 눈을 발견하고 고정된다. 이런 시선의 흐름과 그림 안에서 시간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붓질의 차이다.

아크릴 물감만으로 그려진 <Don’t Hound My Soul>(2024)에서도 화면은 개의 형태와 그 배경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툭툭 얹어진 붓질로 그려진 부분과, 흩날리는 붓질로 그려진 부분으로 나뉜다. 화면에서 처음 보이는 것은 개의 갈비뼈, 다리의 근육, 그림자인지 끈인지 길게 쭉 이어진 회색 줄기, 화면 왼쪽 아래의 흙을 그리고 있는 뭉툭한 붓질들이다. 그리고 계속 눈을 끄는 개 아래의 진한 검은색 갈필은 화면 위의 하늘색, 흙색의 갈필과 함께 연결된다. 관객은 나의 영혼을 잡아가려는 개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그의 말랐지만 강한 몸통을 보고 경탄하면서 겁을 먹는다.  그리고 이윽고 그 다리가 언제 움직일지 노심초사하며 발끝을 바라본다. 발끝에서 이어진 선을 따라 어두운 먹의 골짜기를 발견하면 달릴 준비를 하고, 그렇게 바람이 휘날리는 먼 곳을 바라보며 뛰어가기 시작한다.

드로잉 작품 <Encounter a Pregnant Dog>(2024)에서도 선은 단순히 형태를 그리는 선과 채색하는 선으로 나뉘지 않는다. 콕 찍어 누르는 몸짓이 풀밭의 잔디와 털의 결, 귀, 턱, 젖에 사용되었고, 삭삭 종이를 쓸어 내리는 몸짓이 잔디의 뒷부분, 털의 일부에 사용되었다. 뾰족하고 예민한 부분들은 먼저 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시간을 흐르지 못하게 붙잡아둔다. 그래서 새끼들로 가득 차 있어 불룩 튀어나온 배는 많은 시간이 흘러도 새끼를 꺼내주지 않을 것만 같다. 반대로 사각사각 종이를 부드럽게 어루만진 부분들은 아주 서서히 시간을 흐르게 한다. 그래서 이 그림은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서 개의 털과 잔디만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화면에서 붓질이 먼저 보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림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겪고 나온 관객은 작가의 시간을 다시 헤아려본다. 그렇게 그림의 시간에 담긴 감정은 작가의 감정으로 확장되어 다시 한번 관객에게 찾아온다. 나의 죄를 사하여 줄 것만 같은 어둠이 주는 두려움과 감사, 나의 영혼을 쫓을 연약하지만 강인한 존재에게서 느끼는 경이와 공포, 우연히 마주친 임신한 개에게서 느끼는 안쓰러움과 아름다움. 작가가 다루는 들개라는 독특한 소재와 더불어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은 저마다 고유한 시간성을 지닌 그의 선과 붓질, 다시 말해 그의 몸짓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