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서(nishinotama)의 그림에 대하여

25.4.7

김륜아

그림들은 오래된 물건, 건물, 그림의 일부처럼 보인다. 많은 손가락, 이빨이 있다. 입안을 정교히 그린 것, 눈의 구조를 그린 것, 귀를 그린 것도 있다. 수십 세기 전, 시간이 남아돌던 사람들이 매우 섬세하게 그린 기이한 과학 기록화를 보는 것 같다. 왜 기이할까? 지금의 상식과 맞지 않아서? 낡은 지식이라서? 아니, 오히려 새로운 차원의 지식이라서 그렇다. 근대가 태동하던 시기 그려진, 사람이 어떻게 다치는지 보여주기 위해 몸 온 구석에 갖가지 상처를 달고 있는 의학 해부도처럼, 지금의 사고로는 따라잡기 힘든 과감함과 비인간성이 있다. (이 비인간성은 그 시대엔 인간성이었을 텐데, 그 동안 문명으로 갈고 닦여 현대에는 비인간성이 되어버린 것이겠다.)

강민서의 그림은 그런 옛 사람의 과감한 비인간성을 현대로 가져온다. 작가 역시 현대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과감함은 약해지지만, 바로 그 이유로 기이함은 실제 중세의 그림을 볼 때보다 심화된다. 옛 그림의 갈라짐, 틈, 물감의 벗겨짐 등을 절묘하게 구현한 그의 템페라 기법은 분명 현대인이 조작했음직한 형태들과 맞물려 단순한 유물이 아니게 된다.

눈을 칠한 물감이 조각나고 변색된 것을 구현한 <눈물 분수>는 유물로 보이지 않는다. 눈의 조각들은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광물의 빛을 띤다. 흐를 수 없는 눈물은 조각 난 홍채 안 온전하고 공허한 동공에서 흐르고 있다. 마치 오래된 유적지를 방문했는데 지금도 흐르고 있는 물을 발견한 것처럼,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날 폼페이를 찾은 것처럼. 화성에는 물 자국이 있지만 그렇다고 (아직?) 화성에서 사람이 살 수는 없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분명 과거에 현재가 닿고 있는데, 그 상상에는 증거가 있는데, 이상하게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