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서(@eerietechne)의 작품에 대하여
25.6.12
김륜아
신화는 구전되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이미지로 말하는 이야기다. Myth의 어원 Mythos는 신들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인간의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전달되는 이야기를 뜻한다.[1] 신화는 역사의 각색도 완전히 허구적인 문학도 아니다.[2] 그것보다는 서사에 있어서 시간의 중첩이 발생하는 집단기억, 꿈의 형식에 가깝다.[3] 신화 속 인물들은 자연현상을 인간의 행위로 언어화하여 인격을 부여 받았거나,[4] 그런 원형적 인물이 시간대를 오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5] 이는 당시의 역사 서술 및 의례 형식과 상호작용한다.[6] 다시 말해, 신화와 그 속의 인물들은 과학적 사실로는 설명되지 못하는 인간의 정동, 그 당시 사회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과거, 현재, 미래를 포괄하는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화는 이미지로 이야기한다. 조르주 뒤메질은 신화가 자신이 태어난 공동체의 정치사회문화적 요소들을 정당화하고,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사상을 이미지로 표현한다고 설명했으며, 레비스트로스는 신화가 추상적 관념이 아닌 구체적 이미지로 현실을 표현한다고 말했다.[7] 즉, 신화는 사회의 복잡한 구성 요소들을 포괄하는 생각들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제시한다. 따라서 신화가 시각적 결과물로 인류 역사 내내 표현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원형이 되는 이미지들이 시간대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구성하고 이것이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이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서사가 분절된 채로 끊임없이 전달될 수 있는 회화와 조각이다.
강민서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아득히 먼 곳의 따분한 이야기도, 모든 것이 정연한 현실도 그 곳의 현상을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고리타분해진 고대 신화의 엽기성과 상상을 뛰어넘는 자극적인 현실의 기록 모두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기에는 부족한(어떻게 보면 과한) 이야기와 이미지다. 전자는 우리가 그 엽기적인 신화가 발생했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아 지금까지 공유되는 원형에만 공감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후자는 사건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것이 입에 오르내리는 와중에 변형된 감정들까지 담아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강민서는 혼재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지금의 감정을 건드리기 위해서 클리셰가 된 과거와 자극으로 지리멸렬한 현실 사이의 “이물감”과 “뒤틀림”을 강조한다.
뒤틀림은 시간 사이에 있다. 강민서의 회화와 조각은 과거, 낡은 느낌, 고대의 비인간적 면모, 과감함 등을 참고하면서도 이를 형태적, 서사적 측면에 있어서 변형한다. 관객은 그 과정에서 시간의 뒤틀림을 경험하게 된다. 이 뒤틀림은 작가가 만들어낸 이미지 그 자체에서도,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지자마자 과거가 된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에서도 그 모습을 보인다. 템페라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들은 오래된 물건, 건물, 작품의 일부처럼 손상돼 보인다. 많은 손가락, 이빨이 자라나 있다. 발에서 뼈 사이로 작은 발이 나오고,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의 손가락이 나온다. 귀 안에는 작은 눈동자가 있다. 현대적 재료로 갈라지고 떨어지는 물감 층의 변화를 모방한 표면에 그려진 것들은 분명 고대 신화의 과감함, 엉뚱함, 잔인함을 닮았다. 그런데 현대인은 제우스의 머리, 생식기, 허벅지에서 태어난 아테나, 아프로디테, 디오니소스의 탄생설화에서 이들이 상징하는 가치(지혜, 미, 영적 재탄생)와 태어난 곳의 의미를 연결 짓는다.[8] 그러나 손가락에서 발이 나오고 발에서 작은 발이 나오는 그의 회화는, 마치 그러한 연결이 답답하다고 말하는 듯, 그런 거대하고 무거운 단어를 떠오르게 하지 않는다. <Can’t Hear You in the Water>(2023)는 물 속에 들어가면 귀가 먹통이 되고 희미한 시각에 의지해야 하는 것을 귀 속에 눈알을 박아 넣어 표현했다. <Angel’s fingers>(2023)에서 천사의 손가락은 개수도 여섯 개에, 휘어지기도 하고, 손에서 발이 나오기도 하는 등 확실히 인간의 그것과 다르다. <Genes from Angel>(2023)에서 평범해 보이는 발에는 작은 꼬마 발이 비인간의 고개를 내밀고 있다. 굳이 비유해서 말하자면, 강민서의 그림은 ‘제우스의 머리가 갈라져서 아테나가 탄생한 이야기’가 아닌, ‘어떤 존재의 머리가 깨지고 있는 중’에 가까운 이야기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 <Dragon Sun Burn>(2025)은 꼬리를 문 뱀, 우로보로스, 삶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양면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작가가 집어넣은 태양이라는 요소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우로보로스는 순환하지 못하고, 꼬리를 물지 못하고, 태양빛에 타서 없어지고 있다.
과거를 모방한 표면은 현재에 그려지며, 화면에서 진행 중인 이야기는 현재와 동시에 과거이기도 하다. 의미의 연결이 어렵거나 연결 되더라도 솜털처럼 가볍게 연결되는 형태적 요소가 작품을 현재진행의 존재로 만드는 요소라면, 오래돼 보이는 표면을 만드는 흔적들과 작품 옆면 및 배경을 꾸미는 장식적 요소는 작품을 과거의 존재로 만드는 요소들이다. 사티로스의 털을 생각나게 하는 <Satyr>(2024)의 옆면, 한 사람의 상체가 붙은 켄타우로스의 목의 뒤로 태양의 주기와 말의 갈비뼈, 목뼈가 있는 <Centaur>(2025)의 배경 등 외에도, 작가의 작품에서 옆면과 배경은 단순한 장식적 요소를 넘어서 작품을 이루고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형태 요소와 장식 요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Mother Mermaid Triptych>(2023)에서 잉태한 인어는 비늘 대신 무수히 많은 손가락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사람에서 인어로 변하는지 보여주는 듯 뼈 사이사이에서 솟아나는 손가락은 작품을 둘러싼 테두리의 장식 요소와 대응한다. 테두리에는 원래 인어에 있음직한 비늘과 인어의 알로 추정되는 구체들이 산재해있다. 따라서 삼면화를 둘러싼 이 아름다운 비늘 무늬는 배경의 청록색, 자주색, 갈라진 흔적들과 함께 작품을 예술이 기능을 지녔던 과거로 보내는 한편, 형태 요소가 지닌 알듯 말듯 아리송한 수수께끼와 같은 이야기와 연결된다.
한편, 2024년과 2025년 눈과 손을 소재로 한 일부 작품들, 개인전 <Oviparous Signum>(2025)의 일부 작품들과 <An Eye Constellation>(2024), <Eyeball Map>(2025) 등에서 우리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려진 것은 분명 자세하고 섬세히 그려진 눈과 손일 뿐인데 마치 무서운 존재를 마주한 기분이 든다. 이 그림들은 눈과 손을 자세히 그렸을 뿐, 다른 그림에 비해 엉뚱한 서사적인 요소 또는 장식적 요소가 적다. 이 그림들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수십 세기 전, 몇 천년 전, 시간이 남아돌던 사람들이 매우 섬세하게 그린 기록화를 볼 때의 기이함이다. 근대가 태동하던 시기 그려진, 사람이 어떻게 다치는지 보여주기 위해 몸 온 구석에 갖가지 상처를 달고 있는 의학 해부도처럼, 가시적인 모든 것을 담아내는 집요함은 현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 되었다. 작가 스스로 옛 사람이 되어 그린 듯한 이 그림들은, 특별한 서사적, 형태적, 장식적 요소 없이도 시공간의 뒤틀림을 만들어낸다. 갈라진 표면은 과거의 것을 모방했다기보다는 피부의 조직을 하나하나 그린 것으로 느껴지고, 눈동자에 비치는 빛과 한 올 한 올 그려진 속눈썹은 그 자체로 별자리보다 신비롭다. 충혈된 눈의 혈관이자 갈라진 물감 사이로 보이는 붉은 선은 동공 위에 위치한 시신경까지 담아내는 듯하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가 과학과는 다른 차원의, 그만의 구체적인 질서를 지닌 지식이라고 주장한다.[9] 브리콜뢰르(bricoleur), 만능 손재주꾼은 일에 적합한 도구만을 사용하는 엔지니어와는 달리 언제 쓸모 있을 지 몰라 쟁여둔 것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10] 레비스트로스는 신화를 손재주꾼에, 손재주꾼의 도구상자를 문화의 하위집합에 비유한다.[11] 이때 그는 이미지는 관념일 수 없으므로[12], 이미지와 개념 사이를 잇는 기호가 존재하며, 신화가 이런 연결을 만드는 과정을 손재주꾼의 제작과정으로 비유한다.[13] ‘쓸모 있을지도 몰라 쟁여둔 것들’은 “즉각적 지각”[14]과 “지각을 통한 이해력"[15]으로 손에 넣은 것들이다. 이미지와 개념을 연결하고, 이를 토대로 집요한 시각적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토테미즘은 베르그송에 따르면, 종교와는 거리가 있다.[16] 신화, 토테미즘, 세상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끈질기고 고집스런 본능에 있어서, 그 수단보다 그 관찰 중심적이고 집요한 태도에 더 집중한 것이 강민서의 최근 작업이라고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