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가놀이 (어긋남과 견고함) 이경주 작품에 대해서

25.4.7 김륜아

이경주의 그림 속 중첩된 레이어들은 견고하고 선명한 그림을 만든다. 어긋나게 올라간 레이어, 거친 갈필의 레이어, 섬세하게 꾸미는 레이어 등 각각의 레이어들은 입체감과 질감의 효과를 내면서 화면에 밀도를 쌓는다. 완성된 화면은 정교하게 조절되어 하나의 단일한 화면으로 보이므로, 가장 밑의 레이어가 무엇인지, 총 몇 개의 레이어가 쌓였는지, 각 레이어는 균일한지 한번에 파악하기 어렵다. 어떻게 그렸는지 단번에 파악되지 않는다는 점은 흥미로운 형상과 더불어 그의 그림을 오래 보게 만드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각 레이어는 균일하다. 하지만 분명 화면의 어떤 부분은 더 많이 꾸며졌고 어떤 부분은 덜 꾸며졌으며, 이런 부분들이 모여 전체적으로 균형 있는 화면을 이룬다.

작가의 신작 <Boss(Goth)_Bitch>에서 화장실 거울 뒤의 연보라색 타일은 더 선명하고 밀도 있게 보이는데, 이는 타일을 꾸미고 있는 체크무늬 덕분이다. 연보라색 부분을 자세히 보면 밑에 깔린 파란색에 갈필을 볼 수 있지만, 체크무늬는 이 갈필을 자연스러운 벽의 음영으로 만든다. 한편, 영미의 머리카락이 비치는 화장실 거울은 유리에 해당하는 검은색과 파란색, 그 위에 비친 영미의 머리카락에 해당하는 금빛이 서로 교차하면서 강한 양감을 만든다. 검은색은 여러 레이어가 겹쳐지면서 생겨난 색으로, 그 특성상 더 선명하고 단단하다. 한편 영미의 털 사이사이로 보이는 파란색 레이어는 상대적으로 투명하고 얇아 보인다. (실제로 파란색은 다른 색보다 먼저 쌓인 레이어다.) 그 위를 덮은 털은 빛나는 것처럼 표현하기 위해 여러 번 레이어를 쌓아 그려진 것 같다. 그에 비해, 화장실 거울 옆 두 개의 전등은 레이어가 덜 드러나는 방식으로 양감이 표현돼있어, 독자적으로 빛을 내는 구처럼, 정말 전등처럼 보인다.

그의 화면에서 레이어를 만들고 밀도를 조절하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요소는 캔버스들 사이의 빈틈이다. 이 그림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큰 캔버스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총 다섯 개의 캔버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조립식 화장실 거울 서랍장, 닌텐도DS처럼 위 아래가 나뉜 게임기의 화면 등을 떠올리게 한다. 그 사이의 빈틈은 아주 얇아 정면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캔버스 옆면의 흰색이 보이는 순간 확실히 드러난다. 캔버스 간의 간격은 하나의 화면을 다섯 개의 레이어로, 각각의 창으로 분리한다. 이처럼 다층의 레이어로 이루어졌음이 명확히 드러나는 장치들과 레이어를 통합하고 견고한 화면을 만드는 장치들로 인해 그의 그림은 상반되는 특성을 동시에 갖는다. 이는 여러 개의 캔버스로 이루어진 이번 신작들에서 화면의 크기가 캔버스를 추가하는 것으로 계속 변화할 수 있다는 특성과도 연결된다. 다시 말해, 이경주의 화면은 통합된 하나의 화면이면서도 그렇지 않다.

통일된 하나의 개체이면서도 그렇지 못한 존재라는 점은 그가 다루는 소재와도 긴밀히 연결된다. 그가 만든 캐릭터 “영미”가 등장하는 연작들에서 영미는 2000년대 초반 가정폭력으로 사망했음이 암시되는 사회적 약자다. 분명 한 명의 인간이지만 그렇지 못한 취급을 받은 존재인 영미는 흐르는 물감 자국, 그래픽 디자인이나 미국식 카툰을 떠오르게 하는 형상으로, 시각적으로 재미있게 표현되었다. 영미의 머리카락은 붉은 피 분수가 되기도 하고, 털이 자랄 대로 자라 얼굴을 다 가려버린 말티즈가 되기도 한다. 영미의 얼굴은 아예 사물이 되어 사라지기도 하고, 멍 자국이 흐르는 고통 받는 얼굴이 되기도 한다. 영미가 겪은 고난과 작가가 만들어낸 영미의 죽음 이후의 환상적인 서사는 영미를 애처롭고 귀여운, 그러면서도 어떤 강한 힘을 지닌 망령으로 소환한다. 데포르메된 형태와 그 형태를 꾸미는 시각적 요소들 때문에, 영미는 사회문제의 피해자지만 피해자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영미는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언제나 ‘웃는’ 얼굴로, 강아지로도 분수로도 변신하며 재치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백골처녀> 연작도 마찬가지다. <고독사 (백골처녀)>에서 봉천동에서 고독사한 20대 처녀 백골이의 시체는 두 개의 캔버스를 지붕 모양으로 세워 표현된 머리통과 몸통에 해당되는 캔버스를 바닥에 전시하는 식으로 전시되었다. 백골이의 머리는 각도에 따라 다른 얼굴을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두 개의 캔버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오히려 3D 입체물인 실제 인간의 머리에 비하면 빈약해 보여 그 존재가 겨우 나무 판 두 개로 이루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사람이 죽었을 때 얼굴을 가리는 천이 덮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백골이에게도 살아 생전의 꿈이 있었는데, 이 서사의 레이어는 <백골이의 꿈(노란꿈)>에서 제시된다.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파란 하늘 위로 나부끼는 꽃밭에 잇는 백골이는 꿈을 꾸는 소녀의 표정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얼굴이 해골인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자칫 디자인적이고 만화적인 데포르메로만 읽힐 수 있는 그의 화면은 이처럼 섬세한 캐릭터와 서사구조, 이를 반영하는 그리기 방식으로 인해 단순화되지 않는다. 그가 레이어를 쌓고 그 쌓음을 드러내는 것은 단순히 디지털 이미지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그의 레이어를 서로 연결하고 밀도 있게 구축하는 붓질 또한 단지 전통적으로 밀도 있는 화면을 만들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분절되어 표현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이야기하기 위한 그만의 그리기 방식이다. 레이어 사이의 틈이 드러나면 그 밑에 갈필이 보이듯, 영미와 백골이가 얇은 벽의 빈 공간 사이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장식하는 붓질이 화면을 구축하듯, 영미와 백골이는 작가의 손에 의해 강력한 유령으로 탈바꿈하여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작가는 어긋나고 흔들거릴 수밖에 없는 젠가놀이로 견고한 탑 쌓기를 도전한다. 작가가 만들어내는, 무게 중심이 맞아 무너지지 않는 그 순간은 마치 일부러 다리를 흔들리게 만들어 아무리 무거운 화물차가 지나가도 부러지지 않게 하는 공학의 원리와도 닮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