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16
김륜아
김륜아는 사회에서 유리되어 정제된 자연스러운 인간의 사유 과정을 표현주의 회화로 드러낸다. 김륜아에게 있어 ‘표현주의’란 일종의 클리셰로, 습관화되고 기호화된 붓질을 뜻한다. 그는 사회화된 이성적 인간과 그로부터 억압되는 인간의 본성을 구분하고[1], 전자는 매너리즘적 표현, 후자는 진실된 표현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회화와 드로잉의 위계는 역전되는데, 그는 회화를 주 매체로 하지만 표현의 진실성 측면에서 드로잉을 우위에 두고 회화 제작에 교본으로 삼는다. 한편, 사상가들이 그러했듯 이분법의 두 축은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임을 그도 알고 있다. 따라서 그가 드로잉을 우위에 두지만 회화를 주로 제작하고, 표현주의를 비판하면서 표현주의적 회화를 제작하는 모순되는 태도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이성을 버리지 않고서도 자유로운 인간의 상태를 유지하는 불가능한 상태의 추구다.
따라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순적 태도와 불가능에 대한 지향이며, 이를 위해 다양한 소재를 활용한다. 작업의 시작이 된 소재는 2019년 당시 불안한 상황에서 연상되는 왜곡된 인체 이미지였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신체 움직임을 그림에 도입하면서 몸짓을 드러내는 붓질이 중요해졌으며, 자연스럽게 형태가 없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표현주의 회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표현주의에 대한 관심은 이것이 정녕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언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심과 연구로 이어졌다. 이는 몸짓이 주로 대두되는 추상화로의 이행을 낳았다. 2021년부터 2025년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김륜아의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 추상 회화는 자동주의적인 드로잉을 활용한 실험이다. 음악, 춤, 이미지의 집합 등을 보고 그린 드로잉은 주로 화면을 보지 않고 손의 감각에 집중하여 제작되며, 이렇게 만들어진 드로잉들은 작가의 자아를 지운, 진실한 표현의 창고가 된다. 김륜아는 이를 회화로 옮기는 제작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드로잉에 존재하지 않았던 매너리즘적 붓질은 회화가 만들어낸 환영을 깨고 이성을 되찾는 역할을 한다.
불안을 드러내는 이미지였던 인체 형상은 2021년부터는 회화를 은유하는 상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인체 형상을 활용한 구상 회화는 ‘생동하는 무생물’로서, 발튀스 그림의 인간적인 자동인형들처럼, 그가 보여주는 표현주의의 모순을 드러낸다. 2022년의 휴식기 이후 2023년 새로 시작된 풍경을 소재로 한 작업은 문명과 대비되는 자연이 아닌 인간이 관리한 자연을 토대로 한다. 여행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자연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손길이 닿은 자연이며, 그렇기에 진짜 자연이라기보다는 현실, 관리된 야생에 가까운 것이다. 김륜아는 이러한 직접 경험한 소재를 통해 몸의 궤적을 화면에 옮긴다는 명분으로 진실된 표현의 불가능성을 탐구한다. 이러한 태도와 사고방식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전달 가능한 서사를 활용한 신화 소재의 작업이다. 2025년에 시작된 이 시리즈는 그가 직접 제작한 창작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이 창작 신화에서 인간과 자연, 이성과 동물성의 이분법은 들짐승과 날짐승, 언어와 무언의 대비로 나타난다. 이 작업들에서 회화는 책의 각 챕터를 요약한 것이자 동시에 이야기 전체가 보여주는 태도를 내재한 작업이 된다.
이처럼 김륜아는 특정 소재에 국한되기보다는 그의 태도를 보여줄 수 있는 소재를 찾아 그 속의 모순을 고집스럽게 파고 든다. 표현주의 회화의 모순에 대한 관심은 곧 인간과 그 창조물인 사회의 본질적인 이중성에 대한 관심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매끄럽고 확신에 찬 붓질과 이와 대비되는 긁고 문지르고 파낸 흔적들이 공존한다. 이런 흔적들이 추상화를 만들기도 하고 특정 형태에 종속되어 구상화가 되기도 한다. 강렬한 색채는 통제되지 않고 터져 나오는 인간의 동물성을 은유하는 동시에, 이러한 색채가 구상에 복속될 경우 이성의 세계와 동물의 세계를 조화시키려는 움직임으로 읽힐 수 있다.
[1] 조르주 바타유, 저주받은 몫 - 일반경제 시론―소진/소모, 최정우 옮김, 문학동네, 2022. 속(俗)의 세계와 성(聖)의 세계를 나누는 바타유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