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재

김형관의 회화에 대하여

2025.7.28

김륜아

베르그송에 따르면 인간은 여러 차이를 살아내며 조금씩 진화하기에 의미가 있는 생물이다.[1] 그러나 데이비드 호크니도 말했듯 그림의 역사는 반드시 진보하지 않는다.[2] 최초의 picture라고 부를만한 동굴 벽화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화가들이 뛰어넘기를 시도하는 벽과 같은 존재다. 퇴보라고 부를만한 것도 그림의 역사에는 없다. 구상과 추상의 위계도, 회화와 드로잉의 위계도 전진과 후퇴, 진화와 퇴행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일반화된 포스트모더니즘식의 모든 것이 다 좋다는 허울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좋은 그림이 있고 나쁜 그림이 있으며,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화가들은 저마다의 기준을 갖고 이를 시각적으로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이런 지지부진한 과정이 고단한 화가들의 일이다. 어떻게 보면 그림의 변화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조르주 바타유 식의, “이성적 생산과 동물적 낭비의 반복’’[3]이 진보를 약속하는 역사 서술보다 더 나은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이를 김형관의 작업에 대입해보면, 2007년부터 2017년은 이성적 생산의 시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갤러리 소소의 전희정 큐레이터는 그의 작업을 크게 “보는 것”에 대한 탐구와 “그리는 것”에 대한 탐구로 시기를 분류한 적이 있는데[4], 전자를 이성적 생산, 후자를 동물적 낭비의 시기로 구분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2007년부터 2010년의 <Long Slow Distance> 전시 작품들은 마치 장노출 사진으로 풍경을 찍은 것처럼, 아주 작은 변화들이 미세한 차이로 화면을 채우고 있다. 붓질은 형태를 위해 종속되어 있으며, 색은 작가가 바라는 효과를 위해서 계획적으로 사용되었다. 2012년부터 2017년까지의 건축 모형을 연상케 하는 작업들에서 또한 붓질은 최대한 절제되어 있다. 색은 이전에 비해 다채로워지고 채도가 높아지는데, 이는 마냥 자유로운 표현이라기 보다는 눈으로 공간을 인식하는 행위를 시각화하기 위한 방법에 가깝다. 2012년의 <LightHouse> 전시에서는 입체적인 건물의 건축 도면이 저채도의 아름다운 색들로 채워져 있다. 겹쳐지는 공간의 면들은 각각 색이 달라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각이 공간의 들어가고 나오고를 유추하게 한다. 2014년의 <Linehouse>에서 집은 선만 남았다가, 2015년의 <Windows>, 2017년의 <Brush Past>에 이르면 고채도에 대비 또한 매우 강한 색으로 면이 채워지면서 미묘한 색의 차이로 형태를 분화하는 이전 시기의 작업과 달라진다.

선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적인 것이다. 현실에는 경계가 모호한 면들만 가득하다. 몬드리안의 후기 회화가 보여주듯, 선으로 만들어진 화면은 관객이 명상 상태에 빠지게 하기보다는 그것이 무엇인지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5] 점점 그의 건축적 화면의 변화를 살펴보면, 선과 저채도의 색이 입체물을 이루었다가, 선만 남았다가, 창문 연작에서부터 선보다 색면이 우세해진다. 이를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 빗대어 살펴보면, 어떤 대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그 개념의 본질만을 남겼다가, 그 개념이 탄생한 현실의 경험을 더 극대화하는 흐름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채도가 높아지고 색채대비가 강해지는 변화는 시각적인 변화이기 이전에 보고 감각하는 행위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전제한다. 일반적으로 본다는 행위의 섬세함과 지리멸렬함에는 분명 이전의 미묘한 색의 분화가 어울리겠으며, 개념적인 의미로 파악한 본다는 행위는 선으로 이루어진 화면이 어울릴 것이다. 고채도의 색면과 그 대비가 보여주는 것은 시각이 뇌에서 필터를 거쳐 처리된 최종 결과물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Brush Past>의 작품들은 그 이전의 건축적 작품들보다 더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이후의 변화를 암시하는 단초가 된다.

2017년까지의 작업이 마치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의 회화처럼 매체가 회화일 뿐 개념미술에 가까운 그림들이었다면, 2020년의 과도기를 거쳐 2021년에 이르면 에너지를 소진하는, 낭비의 시기가 온다. 그렇다고 그가 아예 이성적인 생산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의 메타적인 시선, 본다는 것에 대한 끈질긴 탐구는 2020년의 <Study-tree> 연작이나 2022년의 <얼굴> 연작에서 드러난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한 순간을 다루기보다는, 시선의 궤적을 어디로 나아갈지 모르는 열린 붓질로써 다루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그의 작업에서 회화와 보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는 충동과 본능을 수용한 낭비의 시기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2021년의 <끝없이 돌아가는 길>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정제된 붓질과 오일스틱의 흔적들은 낭비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동안 억눌렀던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행위의 표출이지만, 그림을 이루는 구성 요소에 있어서 선과 시선의 흐름을 중시한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안과에 가서 검사를 받다 보면 시선을 한 자리에 고정 짓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는데, 사람의 눈이란 짧은 순간에도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는, 고정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2021년 작업들에서 곡선들이 이리저리 뻗어나가고 굽어지며 만들어내는 형태들은 자유로운 표현임과 동시에 고정되지 않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본능의 표출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은, 그 흔적들이 매우 정돈되어 있기 때문이다.

2024년에 이르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물감을 긁고 치대서 만든 촉각적인 화면이 등장한다. (후술하겠으나 이런 촉각적 표현마저 정제되어 있다는 점이 그의 특징이다.) 이처럼 2024년의 개인전 <꿈 뼈 재>는 그리기 방식에 있어서 더 깔끔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들을 선택하고, 더 시적으로 감각을 전달하는 그림들을 선보였다. 그런데 애당초 시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자유로운 감성의 표현을 시적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으나, 단어의 조합으로 감각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일은 언어를 빼어나게 정제해야 하는 머리 아픈 과정이기도 하다. 표현 방식은 이전에 비해 자유로워졌으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화가의 정제에 대한 열망은 더 드러난다.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꿈>, <뼈>, <재>는 목탄으로 그려져 더러워지기 쉬운 그림이지만, 전혀 더럽지 않다. <꿈>에서 지푸라기 같은 덩어리는 선을 뭉개기보다는 한 올 한 올 쌓아서 깔끔하게 이루어졌으며, <뼈>에서 화면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세로 획들은 마치 스프레이로 빠르게 그은 듯 정직하고 올곧다. <재>는 제목이 제목이니만큼 얼룩덜룩할 수도 있음에도 까맣게 타버린 손의 궤적을 나타낸 듯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새하얗다. <이끼>나 <찐득하고 축축한>이 보여주는 촉각적 화면 또한 균일한 두께를 지니고 있으며, 색의 사용이 계산되어 있다. <이끼>에서 그린 옐로우 위로 올라간 새빨간 자국들은 비례와 균형을 지켜 자리하고 있으며, <찐득하고 축축한>에서 습한 장마철의 공기는 비리디안, 카드뮴 옐로우, 코발트 바이올렛이 각각 화면에서 적절한 비율을 차지하여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