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이 되어라

<게임 코러스> 서평

김륜아

<게임 코러스>는 게임의 “UI(User Interface)”를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다루는 연극의 “코러스”에 빗대어 게임의 예술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다. 저자 영이에 따르면 UI와 코러스는 각각 게임과 연극 속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데, 이는 UI와 코러스가 게임과 연극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1] 연극은 애초에 관객석과 제단과 합창단석으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며, 게임도 UI가 없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2] 저자가 지적하는 이들의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이들이 쾌를 위해 관객과 플레이어에게 이 세계에 진입하고 싶은 욕망을 부채질하는 존재라는 것이다.[3] 이를 위해 저자가 인용한 게임은 <언더테일>이라는 독특한 게임이다. 이 게임은 2015년 발매되어 많은 게임 유저들에게 충격을 선사했는데, 게임의 UI로 플레이어를 속이는, 일종의 메타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메뉴 설정 창, 체력 등 상태 창 등 기본적인 UI로 여겨지는 것들이 사실 게임의 스토리상 중요한 반전요소라는 지점은 UI가 플레이어로 하여금 게임 속 세상을 실재로 인식하게 하는 방법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한편, 나는 저자가 UI의 코러스적 예시로서 이런 메타 게임을 골랐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저자가 게임의 전체 분위기와 알맞은 UI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예시로 든 <켄시>, <림월드> 또한 게임 그 자체보다 유저들의 기상천외한 플레이 방식으로 더 유명한 게임들이다. 게임에 현실만큼 몰입하게 하는 UI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단 현실을 경유하여 이것이 허구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책 후반부에서 저자는 UI 중에서도 퀘스트창 같은 보조적 UI보다는 방향키와 같은 전제적 UI들이 더 지배적이고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한다.[4] 그러니까 게임에 몰입하게 하는 요소는 스토리적 요소가 아니라 현실에서 게임 패드, 키보드, 마우스 등을 조작하는 물리적인 요소에 더 기인한다. 저자는 UI가 플레이어에게 발생시키는 게임 충동은 현실이 인간에게 종용하는 욕구와 다를 바가 없다고 설명하는데,[5] 나는 UI가 발생시키는 게임 충동이 버튼이 있으면 눌러보고 싶게 하는 본능적 충동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앞서 언급한 게임들이 현실을 경유하는 것도, 게임 UI에서 물리적인 요소가 중요한 것도, 결국 게임에 재미를 느끼고 계속 해나갈지 결정하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은 통제권을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을 때 재미를 느낀다. 내 클릭 한번만으로 캐릭터를 죽일 수 있고, 내 조작 한번만으로 게임 세계 자체를 박살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게임의 UI라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저자도 언급했듯, 비극의 코러스나 게임의 UI가 욕구를 부채질하는 방식은 스토리와는 상관없이 매우 현실적인 욕구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게임 오버가 될 것을 알면서도 버튼을 눌러보고 싶어서, 진행 방식을 바꾸는 숨겨진 커맨드를 찾고 싶다거나. 전부 스토리보다는 “자판기의 버튼을 다 눌러보고 싶다”에 가까운, 현실적이고 충동적인 욕구와 관련이 있다. 이는 게임을 만든 것도, 하는 것도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게임이 추동하고 플레이어가 느끼는 충동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그 안에 있는 파괴적인 충동, 재미를 위해서라면 뭐든 포기하게 하는 충동이다. 비극에서도 코러스는 결국 파괴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주인공을 돕기는커녕 그저 방관하며 그 선택을 오히려 부추긴다. 오직 극의 재미를 위해서 말이다. 저자는 순전히 재미를 위해 게임을 하는 것처럼, 생존 또한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 쾌를 위해 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6] 이는 삶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든 여러 예술가들을 떠올리게 한다.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은 삶을 예술로 통합시키고자 했으나 사실 그렇게 될 때 벌어지는 것은 생각보다 끔찍할 수도 있다. 예술적 쾌를 위해 효용 따위는 무시하고 삶이 곧 예술이 되어버리면, 테칭 시에의 작품에서처럼 개인은 예술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다.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순전히 “좋아서”, “재미 있어서” 예술을 지속하는 많은 작가들의 환상과는 다른 현실의 삶을 살펴보면 재미만 추구한 결과의 파괴성은 쉽게 관찰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창작물에서 예술성을 느낀다. 이는 아마도 바타유가 이야기한,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기로 한 데서 오는 이성을 버리는 시간의 필요성에 기인할 것이다. 인간은 ‘이성’을 추구하는 ‘동물’인 바, 이성과 생산성을 전부 버리고 에너지를 낭비하고 소진시키는 시간이 없으면 살 수 없다.[7] 과거에는 이것이 희생제의와 같은 종교의식이었고, 현대에는 예술을 만들고 향유하는 것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은, 낭비 의식에 관객이 직접 관여하게 한다는 점에서, 관객을 관객이 아닌 공범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누구보다 치밀하고 영리한 예술이 아닐까?

[1] 영이, 게임 코러스, 서울: 워크룸 프레스, 2025. pp.18~19

[2] 같은 책, p.19

[3] 같은 책, p.24

[4] 같은 책, p.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