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그림의 깊이

갤러리 소소 신진작가전 <껍데기와 알맹이>에 관한 글

김륜아

“나는 예술의 저주받은 몫을 이렇게 정의하려 한다: 물 속으로 뛰어들기. 나는 패스톰으로 그리고 묘석 위에 새겨진 양팔을 앞으로 내민 잠수부에게로 돌아온다. 그것은 신의 심판이다. 모든 예술가는 생명을 잃는 데 동의해야만 한다.”[1]

파스칼 키냐르는 『은밀한 생』에서 예술이 ‘물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패스톰(Paestum)은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곳으로, 고대 그리스 시기의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연회를 위해 제작됐다고 하기에는 굉장히 특이한, 파도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의 그림이 있다.[2] 키냐르가 말하는 예술의 ‘저주받은 몫’이란 아마도 바타유가 말하는 ‘저주받은 몫’, 예술로써 인간이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소모시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 게다.[3] 나는 키냐르의 문장에서 특이한 지점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잠수부’다. 그림 속에서 물로 뛰어드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것이 타당해 보이지만, 키냐르는 그를 잠수부라고 표현한다. 그림 속 인물이 됨으로써 영생을 얻었다는 것일까? ‘Diver’의 오역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정말로 그가 죽지 않고 살았다고, 잠수부라고 믿는다. 잠수부는 물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물의 표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물을 통해 바다 밑바닥을 본다.

예술가는 어떻게 기꺼이 생명을 내놓는 바보 같은 짓을 저질러 놓고도 죽지 않을 수 있는 걸까? 그것은 생명을 ‘내놓는’ 방식에 있다. 세상 모두에게는 저마다 중히 여기는 생각과 가치가 있고, 이는 때로는 머릿속에 저장되고, 때로는 입 밖으로 꺼내어지고, 때로는 아예 제거된다. 예술가는 보통 이 생각을 자신의 창작물로써 적당히 가리고 적당히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바로 꺼내기 보다는 일단 가린다는 점에서, 가리려고 만드는 데 속의 것이 결국 드러난다는 점에서 예술가는 바보라고 할 수도 있고, 고도의 전략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들이 이렇게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언가 만든다는 일에서 오는 고도의 집중상태에 있다. 그리고, 바르고, 깎아내고, 파내고, 덧붙이며 저마다의 솜씨로 작업할 때에는, 생각을 가리거나 보여준다는 목적보다 작업하는 것 자체가 중요해진다. 움직임은 사람을 집중시키고 생각을 잊게 만드는 법이다.

이러한 잠수부들 중에서도 화가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화가는 끝이 없는 바다의 깊이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촉진하려고 든다. 바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계속해서 물을 잡으려고 한다. 물은 얼핏 손의 압력에 눌리는 것 같지만 곧이어 스르르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간다. 화가는 그 감각을 즐김에 틀림 없다. 산소통이 바닥날 때까지, 죽기 일보 직전까지. 화가는 얼핏 환영으로 생각을 말하는 사람 같지만, 누구보다도 물질로 말하는 사람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화가들이 지지체 위에 그려내는 것은, 시각적 환영이라기 보다는, 실제로 물리적인 깊이를 지닌 무엇이다. 주방에 켜켜이 쌓인 기름때, 얼룩덜룩 때가 탄 신발, 울룩불룩하게 딱지가 앉은 상처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 감각을 모르는 사람들과 화가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언어, 환영, 생각은 몸짓, 실재, 물질과는 먼 개념이다. 화가들은 전자가 요구하는 획일적인 깊이에의 강요에 거부감을 느끼고, 작지만 확실한 반항으로써 후자를 반영한 저마다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글을 쓰고 말하는 요즘의 화가들이란, 번역에 상당한 어려움을 느끼면서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눈과 마음』에서 화가가 보는 깊이(depth)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게 깊이란 사물들이 하나의 총체적 장소 안에서 동시에 주어지는 방식,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이 ‘거기에 있다’고 느끼게 하는 부피성이다.[4] 이러한 깊이는 일반적인 의미의 3차원과는 다르며, 단순히 원근법으로 대표되는 환영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바다를 볼 때, 우리는 물을 통해 그 안의 물고기 한 마리 한 마리를 보는 것이면서도 그것들이 한 장소에서 만들어내는 부피를 보는 것이면서도 하늘 아래서 하나로 나타나는 덩어리를 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복합적인 지각의 경험을 화면 위에서 작동하게 할 때, 화가는 비로소 깊이를 획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화가들이 말하는 깊이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메를로-퐁티는 수영장의 비유를 든다. 우리가 두꺼운 물을 통해 수영장 바닥을 볼 때, 물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에 직접 포함되지는 않지만, 물이 만들어내는 왜곡과 파문, 수영장 바닥 타일의 기하를 지각하는 ‘몸’이 없다면, 우리는 수영장을 그것 그대로, 그것이 있는 자리에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5] 물이 그러했듯, ‘대상의 본질이 발하는 활기’[6]를 보게 하는 것. 이를 위해 화가는 깊이, 공간, 색, 명도, 농도, 구도, 채도, 질감 등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조형언어들로 고군분투한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재현과 환영이 아닌 방식으로 대상의 본질이 지닌 활기를 표현하는 것이 곧 깊이를 표현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