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과 수르디

몸, 걸작과 장식을 넘어서

김륜아

세잔이 위대한 화가인 이유는, 그가 과거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낡은 점은 과감하게 혁신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좋은 작품이란 그런 것으로 배운다. 그런데 이러한 ‘기준’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선적인(linear) 미술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 그 역사 속에서 유지되는 특질들이 분명 있으며, 이러한 특질을 함유한 미술이 좋은 미술로 인정 받는다. 그러나 실제로 그림을 그리면서 나는 이 '좋은 그림'이라는 기준 자체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미술사는 작품의 혁신은 이야기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겪는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일들은 좀처럼 말해주지 않는다.

이번 전시에서 나는 풍경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풍경은 2023년 이후 내게 지속되는 소재인데, 직접 보고 겪은 풍경을 그리는 것이 번아웃을 극복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전시의 풍경들은 여행에서 보는 생소한 풍경이 아니라 일상의 자연 풍경이다. 매일 남산을 산책하며 본 소나무 숲, 쌓인 낙엽과 잘린 나무 더미들, 특이한 모양의 나무와 뿌리들을 기억을 바탕으로 그렸다. 그때 그 장소에서 본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 기억을 계속 붙잡을 때, 순간적으로 집중해서 그려내기도 하고, 오랫동안 어렴풋한 기억을 좇으며 그려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풍경화를 그리면서 과연 이 그림들에 예술적 가치가 있을지 스스로 의심했다. 내게는 풍경화 그리기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이지만, 과연 무엇이 새로울 수 있을까? 나아가, 그 새로움이라는 기준은 믿을 만한 것일까?

풍경화는 집안을 장식하기 좋은 그림으로 여겨진다. 역사적으로도 풍경화는 그림의 장르 중에서 낮은 위치에 있었다. 세잔이 높이 평가 받는 이유는, 풍경화라는 위계가 낮은 장르를 그림에 있어서 본질적인 ‘보는 행위’를 시각화하는 방식으로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대단한 혁신도 시간이 지나면 낡고, 고전으로 전래될 뿐이다. 세잔의 그림도 오늘날에는 누군가에게는 그저 ‘예쁜’ 장식품으로 보일 수도 있다.

에밀 졸라와 세잔이 결별한 원인이 된 졸라의 소설, <작품>은 당대의 평가 기준을 앞선 걸작을 그리고자 했던 예술가의 이야기다. 졸라가 <작품>에서 ‘좋은 그림’을 그리려는 화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예술가가 믿는 좋은 그림의 기준이라는 것은 항상 변화하며, 그 와중에도 고집을 꺾지 않는 태도가 예술가답지만, 그것이 과연 죽음을 택해야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졸라의 또 다른 소설, <수르디 부인>의 주인공 수르디 부인은 처음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여성적 취미화가였지만, 어느 순간 남편보다 더 '좋은 그림'을 그리게 된다. 졸라는 부인이 ‘여성적’ 그림에서 ‘남성적’ 그림으로 ‘발전’한 것처럼 묘사하지만, 나는 다르게 읽고 싶다. 그녀는 평가의 기준에 맞추어 ‘발전’한 것이 아니라, 성별이 주는 제약에서 점차 벗어나 본성을 되찾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림은 시간*-변화하는 평가와 선적인 역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진부한 ‘걸작’도 의미 없는 ‘장식’도 되지 않고 오롯이 자신으로 존재하는 길이 있을까? 그것은 역시 그림을 물질로 마주했던 화가의 경험을 관객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림은 동굴 벽화에서부터 시작해 언제나 물질이었다. 교과서 속 평평한 그림도 실제로 가서 보면 순식간에 입체적으로 되살아나고, 집 안을 장식하기 위한 그림이 집 안 전체를 먹어버리기도 한다. 물질로서 그림은 상상 속의 얇은 이미지와 달리, 크기와 무게, 표면을 통해 관람자의 몸과 마주한다. 관객의 몸으로 경험되는 그림은 그 이전에 화가의 몸의 산물이다. 그리고 화가를 화가답게 하는 것은 그들의 이상한 ‘집착’과, 그 집착이 ‘몸’으로 드러나는 것에 있다. 세잔이 산을 걸으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듯, 호퍼가 동네를 걸으며 보이는 것들을 그렸듯, 모란디가 벼룩시장에서 산 별 것 아닌 물건들을 그렸듯, 화가의 행위는 일상적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화가가 남들과 달라지는 지점은 남들과 똑같이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이상한 집착 하나를 놓지 않는 데 있다. 그리고 이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체득되는 생활 근육과 굳은 살로 드러난다. 그림의 ‘발전’이란 어떻게 보면 그러한 굳어진 몸짓들이 그렇게 그리게끔 해서 도달하는 것이다.

내 그림은 종종 남자가 그린 그림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섬세하고 꼼꼼하게 붙잡는 방식보다 한번에 거칠게 그려내는 방식에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다른 화가들처럼 나도,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내 몸에 맞는 방식을 익혀온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거친 표면의 그림들은 각기 다른 시간을 거쳤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그려진 그림도 있고, 여러 번 덧칠하며 오래도록 변형시키며 그린 그림도 있다. 재미있는 점은, 각 그림들이 관객에게 어떻게 읽히고 평가되는가이다. 내 예상과 달리 대부분의 관객은 오래 그려진 그림보다 빠르게 그려진 그림을 더 좋아했다. 그럼에도 내가 오래 여러 겹 쌓아서 그리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래 그린다고 반드시 내 경험이 잘 담기는 게 아닌데, 내 몸이 그림과 오래 함께 할수록 내가 그림 안에 더 잘 담기는 것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