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하기 배척하기 거부하기[1]

콘노 유키

<사고 The Accident>(2020)라는 작품에서 김륜아는 어렸을 때 자동차에서 떨어진 기억, 그때 느낀 심리적 충격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이 작업을 비롯해 그의 회화는 물감의 물성과 질감, 그리고 붓으로 만지거나 역으로 긁어낸 표현과 색감이 강렬한데, 혹자는 어떤 욕망이나 폭력성이 두드러진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2026년 4월 6일에 쓴 작가 노트에 등장하는 ‘인간다운 것’이라는 표현 역시, 욕망이나 폭력성에 연결해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김륜아의 회화를 멈출 수 없는 활력이 발휘되는 장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사고 The Accident>에서 끝이 예리한 도구—가령 손톱이나—로 물감을 긁어낸 부분이 보일 때, 그것은 유년기의 충격적 기억을 더듬는 것과 상처를 입지 않았는지, 아픈 부분이 없는지 걱정하면서 자신을 살펴보는 수행성이 내면화되어 있다. ‘Accident’라는 제목이 함의하는바, 그러니까 ‘사고’를 ‘사건’으로 바꿔 읽는다면, 김륜아의 작품은 회화 공간에서 펼쳐진 액션(action)을 주체성의 발휘(에 의해 일어난 사건으)로 읽는 대신 쓰러진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지 확인하는—심리적이고 신체적 동요를 동반한—절차에 더 가깝다. <사고 The Accident>에서는 앉아서 달리는 곳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경험한 시공간적 이탈, 외상과 내상의 유무와 관련성, 기억과 그 현재화 사이를 오간다. 말하자면 김륜아에게 ‘인간다운 것’이란 욕망을 쏟아내는 주체보다는 망연자실한 상태에 제 위치를 애써 찾아가는 태도이다.

2019년에 김륜아는 불안과 함께 떠오르는 ‘형상을 재현’하는 작업과 불안을 반영하는 ‘몸짓이 대두되는’ 작업에서 출발하였다[2]. 이 두 축을 오가면서 획득되는 ‘인간다운 것’에서 몸짓은 신경 반사적 태도로 수용된다. 재현은 몸짓으로 거부당하는데, 이 몸짓은 불안으로 거부당한다. 하지만 불안은 몸짓과 재현을 근절하는 대신 흔들리는 회화로 기록된다. 이번 개인전 《Hand-Held 흔들흔들》(더 소소, 2026) 제목은 카메라를 손이나 어깨에 의지하여 촬영하는 기법을 가리키는 ‘Hand-Held’와 유사한 어감이자 뉘앙스를 가진 ‘흔들흔들’을 결합한 것이다. 카메라 촬영에 빗대어 말하는 경우조차도 김륜아의 관심사는 시각장의 통제가 아닌,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에 있다. 불안은 내가 내적/외적 요인에 의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수동성이며, 김륜아에게 드로잉과 캔버스 사이, 그리고 직접적인 경험[3]에 의해서 고정되지 않는 상(像)이자 장면으로 나타난다. <장면-빨간색>(2021)과 <장면-노랑>(2021)에서 제목에 들어간 색채는 회화에 기록된 한순간임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장면’이다. 실제로 <장면-노랑>에서 노란색은 화면에서 지배적이지만 빨간색, 초록, 그리고 분홍색과 주황색이 들어간 부분보다 비중이 작다. 이는 곧 노랑은 장면의 주인공은 될 수 있지만, 회화 화면 자체가 노랑으로 장악하지 않음을 말한다. 작가에게 장면이란, 내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데서 오는 긴장과 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연극 무대와도 같은 의미가 아닐까. 심리 상태와 표현 사이 흔들리는 지점에서, 어떤 대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바꿔 말해 ‘붙잡는’ 행위에 딜레마와 모순이 발생한다.

김륜아에게 상을 붙잡는 행위는 어떤 사건을 만드는 대신 나-대상 사이에서 제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균형을 (되)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No.33 Seen from Four Angles>(2024)는 같은 대상을 놓고 네 개의 시선으로 나누어 보여준다. 네 개의 화면은 CCTV처럼 상태를 원격으로 계속 주시하는 시선의 통제권 아래에 있는 것과도 같다. 각각 초록색 위치와 빨간색으로 나뉜 구도가 보이는데, 왼쪽 상단을 보면 사물을 보는 시선뿐만 아닌, 위아래가 바뀌어 있다. 이를 단순히 네 시점(視点)으로 나누어서 그린 정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필 네 화면 중 왼쪽 상단의 회화는 상하가 바뀐 시선일까. 이는 <사고 The Accident>에서 김륜아의 경험, 그러니까 기억과 상처를 더듬던 시점(視点/時点)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시선이 뒤집어지고 내가 어디에 있고 내 몸이 어떤지 확인하기—사고 현장의 경험은 고꾸라진 시선에서 기-승-전-결의 ‘전轉’을, 그럼에도 ‘결(과물)’로 이어진다는 균형 감각을 되찾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는 시점(視点)이 바뀌어도 사물의 본성은 유지된다는 식의 이해보다는, 그리는 사람의 시선이 전복(upside-down)되면서 (마치 사고를 당한 순간처럼)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가 (안) 아픈지 자신을 살펴보는 태도에 더 가깝다. 이는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 그치지 않고, 회화를 대하는 태도로 반영되어 있다. 오랜만에 작업을 다시 꺼내서 잠깐 만져봤더니 아직 물감이 안 말라 있었다는 일화[4]는 (의미심장하게도) 보관한 상태와 작품을 보여주는 상태, 즉 창고 안에 포장지로 보호한 상태와 포장을 벗겨 공개하는 일에 생긴 시차(時差/視差)를 확인하는 과정을 공유한다.

김륜아는 드로잉이 회화보다 더 진실성이 있다고 한다[5]. <흔들흔들(swing)>(2021)은 드로잉을 거쳐서 완성된 작업인데,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도입부의 흔들리는 장면을 보면서 그린 드로잉에서 작가는 영상을 보면서도 종이를 안 보고 그린다. 이 드로잉을 보고 완성한 <흔들흔들(swing)>는 드로잉의 감각을 얼마나 따라할 수 있을까. 신체적 움직임이 캔버스를 상대할 때, 그것은 드로잉을 눈으로 보고 다시 그리는 일인지, 아니면 습득된 신체적 감각을 활성화하여 작품으로 만드는 일인지. 김륜아에게 학습과 적응을 거친 눈과 신체 동작은 연습의 공간에서 실전으로 이행한다고 해서 여기에는 오차가 없는 것일까. 회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거짓된 표현[6]이야말로 김륜아에게 모순적인, 고로 ‘인간다운 것’으로 발현한다는 것이다. <흔들흔들(swing)>은 대상을 화면에 놓고 보듯 재현한 것이 아니라 드로잉에서 내가 감당하던 크기보다 커지면서 그 상황에 적응하려는 과정이 담긴다. 화가는 붙잡는 대상을 향해 손을 뻗는 동시에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나-대상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다. 아무리 물감이나 붓터치/긁어낸 부분의 질감이 강조된다고 하더라도, 그의 회화는 무의식이나 욕망, 더 나아가 폭력성의 분출보다는 사고를 당한 자의 시선에서 제 위치를 찾는 수행(遂行)성을, 말하자면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훈련을 한다는 의미에서 수행(修行)을 거듭한다.